김지온 기자(삽화부)
김지온 기자(삽화부)

저는 삽화 기자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이들에겐 항상 예술의 효용에 대한 의심이 따라붙고, 그 의심에 변명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에 시달립니다. 이것은 비단 저만의 고민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그림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듯, 글을 쓰는 사람들도 글의 쓸모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결국 이것은 신문을 만드는 우리 모두의 고민입니다. 우리의 글과 그림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런 고민이 저를 덮칠 때마다 판도라의 상자를 떠올립니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를 하나 주면서 “절대로 열어 보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하지 말라는 것은 더욱 하고 싶은 법입니다. 판도라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살짝 열어봤습니다. 그 상자 안에는 인간에게 해가 되는 온갖 것들이 들어있었습니다. 뚜껑이 열리자마자 죽음, 질병, 질투, 전쟁, 절망 등이 상자에서 튀어나와 세상에 퍼졌습니다. 놀란 판도라가 뒤늦게 상자를 허겁지겁 닫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고, 상자 안에는 오직 희망만이 남겨졌다고 합니다. 많은 신화와 문학이 그러하듯 이 이야기도 수많은 질문을 남깁니다. 왜 인간에게 해가 되는 것들이 담겨 있다는 상자 안에 희망도 함께 들어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희망도 인간에게 해가 되는 것 중 하나였던 것일까요? 하필이면 왜 가장 마지막에 남은 것이 희망이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희망이 오히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헛된 희망은 가능성 없는 일을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바로 상자 안에 희망이 갇혀 있던 이유라 말합니다. 물론 희망 고문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희망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습니다. 저는 희망이 ‘가장 마지막까지’ 상자 안에 남아있었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은 언제든지 자신을 붙잡을 수 있게 옆을 지켜줍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인간을 게으르게 놔두지 않습니다. 가능성 없어 보이는 일에도 포기하지 않게, 부단히 노력하고 끊임없이 시도하게 합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대학신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주변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대학신문에 들어와 기자로 활동하며 점점 세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자, 저는 점점 두려워졌습니다. 세상엔 온갖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들이 퍼져 있었고, 여전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나조차 그림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의심될수록, 내가 마주한 고통이 너무 클수록, 내가 너무 작게 느껴질수록, 오히려 저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곤 희망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펜을 들어 올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 리 만무하지만, 이미 온갖 부조리와 비합리로 가득한 세계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까지 탈탈 털어 희망을 꺼내는 것입니다. 저에게 그것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며, 저는 성실하게 펜으로 종이를 가를 때마다, 희망은 그 틈으로 조금씩 새어 나온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문을 만드는 일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성실하게 희망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매주 월요일, 새로 나온 네모난 신문지를 조심스럽게 펴고 넘기는 이 행위가 마치 상자를 여는 행위와 닮은 것은 정말 멋있는 우연이라 생각하며, 사실 모든 변화는 희망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문득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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