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은화 편집장
채은화 편집장

부끄럽지만 작은 고백을 해보고자 한다. 나는 ‘비둘기’를 싫어한다. 어렸을 때부터 조류와는 친하지 않았다. 작은 병아리를 보고도 겁에 질리기 일쑤였고, 닭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서울에 와서 가장 괴로웠던 건 마치 나를 째려보는 듯한 비둘기의 눈빛과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그들의 날갯짓에 늘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는 것이다.

하루는 집에 가는 길, 현관문 앞에 비둘기 떼가 모여있었다. 무서운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30분을 빙 돌았다. 비둘기가 자리를 뜨고 나서야 그제야 재빨리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무서운 마음을 토로하듯,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엄마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비둘기가 어때서? 귀엽기만 한데, 싫어하는 마음은 너한테 있을 뿐이야”.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왜 비둘기를 싫어하는가, 왜 그리도 무서워했는가. 그들이 유해 동물이라서? 도시 경관을 해쳐서?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은 그저 나와 같이 비둘기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해놓은 변명일 뿐, 그리 납득할 만한 이유는 아닌 듯했다. 실제로 비둘기가 사람에게 전염병과 같은 병을 옮기는 일은 거의 없었고, 도시 경관이라는 것 역시 인간 중심에서 바라본 경관일 뿐, 비둘기는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도시를 향유해왔다. 나는 그저 그들이 ‘내가’ 싫어하는 모습이라서, 혹여나 나를 공격할까 하는 ‘내’ 두려움 때문에 그들을 싫어했다.

결국 무언가를 싫어하고,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원인은 그들이 아닌 ‘나’에게 있었다. ‘내가’ 그저 그들이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내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특정 집단을, 혹은 특정인을 이유 없이 비난하고 혐오하는 양상과 비슷했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 젠더 간의 서로에 대한 비난과 혐오 등, 따지고 보면 혐오의 이유는 혐오의 대상이 아닌 혐오하는 주체에게 있었다.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느껴져 혐오하고, ‘나’의 기회를 빼앗는다고 생각해 혐오한다. 그것이 실제와 같은지, 실제로 어떤 분야에서 누가 주류의 영역을 차지하며, 누가 더 많은 기회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주류인 내가 살아가는 이 공간 속에서 ‘나’는 그것이 그저 싫을 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그동안의 내 생각이 참 바보같이 느껴졌다. 비둘기를 싫어하는 이유가 나한테 있었다면, 내가 생각을 고쳐먹었어야 하는 문제였다. 문 앞의 비둘기를 보며 제발 가라고 소리칠 것이 아니라, 비둘기를 이유 없이 싫어하는 내 마음을 멀리 보내버렸어야 했다. 고작 주류를 점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미워하고, 싫어했던 내 모습은 오만하고 기만적이었다.

이후로 무언가에 대해 싫은 감정이 들 때면, 곰곰이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 원인이 그 대상에게 있는지, 아니면 싫어하는 주체인 내게 있는지, 고민해보면 대다수 후자의 경우가 많았다. 결국 내 생각을 고쳐먹었어야 했던 여러 가지 이유로 누군가를 싫어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비둘기를 싫어하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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