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철(영어영문학과 석사과정)
김윤철(영어영문학과 석사과정)

이런 재난 와중에 비대면 수업에 대해 적는 것이 알량한 일임을 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이후를 헤쳐가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경험의 조각들이 필요할 것이기에, 1년 넘게 비대면 수업을 겪으며 얻은 조각을 보태려 한다.

전에는 몰랐지만, 현실은 시시각각 무수히 많은 것이 움트는 곳이었다. 강의실에서는 말 한마디마다 실시간으로 공감, 의문, 유보가 따라붙는다. 첨언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없어도 기류로 알 수 있다. 그래서 학우들의 지적 반응이 다 내 것이 된다. 우린 강의실에서 매 초 주선율이 되는 말에 더해 서로의 앎까지 함께 배우는 것이었다. 비대면 수업에서는 말, 생각, 감정의 중첩이 사라졌다. 이런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상호작용은 진짜로 같이 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창밖의 나무 소리, 하늘대는 해그림자, 동료들이 내뿜는 열의, 이 모두는 강의의 배경이 아니라 실질이었다. 강의실의 약동하는 현재는 강의 내용과 호흡하며 앎이 단단히 자리 잡게 하고, 그 앎이 우리 세계에 관한 것임을 환기해 살아있는 앎이 되게 한다. 비대면에선 하나의 균질화된 ‘러닝타임’이 동시다발적인 생동을 대체했다. 출연진에서 관객이 된 우리는 수업을 겪지 않고 관망하게 됐다. 그러니까, ZOOM에서는 현실의 무한한 주름이 다 다려지고 매끈한 화면만 남아버렸다. 덕분에 비대면 1분은 대면 1분보다 한없이 빈곤했다.

발표가 두려워졌다. 말하다 보면 네모난 고체를 앞에 두고 혼자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어왔다. 그럴 때면 횡설수설하게 됐다. 화면 안의 차가운 얼굴들은 중압감을 더했다.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다. 의사소통은 그저 완결된 정보를 송출·수신하는 일이 아니란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현대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상대가 자신과 나를 보는 관점, 상대와 내가 대상을 보는 관점을 느끼고 상상하는 것이 사회적 상호작용의 근간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청자는 내가 어떤 생각을 전개하고 있는지 재확인시켜줄 뿐만 아니라 사고를 함께 발전시켜주는 협력자가 되는 것이었다. 상대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줌 수업에서는 대화가 혼잣말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발표가 종종 사고의 확장 대신 혼란을 불러왔다. 전까지 우리는 곁에 있음으로써 서로가 자기 생각의 좌표를 찾도록 돕고 있던 것이었다.

공간성이 사라지자 시간이 증발했다. 시간의 양이 늘긴 했다. 그러나 이동 없이 고인 시간은 대부분 못 쓰고 버리게 됐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은 신기하리만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시간이 공간에 담겨 기억이 된다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학부 시절의 기억은 공간에 깃들어 있다. 낡고 소중한 인문대 복도, 동기들과 짜장면을 나누던 잔디밭이 있었기에 그때를 떠올릴 수 있다. ‘정신과 시간의 방’에 갇힌 지난해는 담기는 곳 없이 꿈같이 스쳐갔다. 누군가와 수업을 함께했다는 게 거짓말 같다.

이 모두는 공동체를 뒤흔들었다. 서로의 고통을 나누는 시간이 연구를 버티게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잊어가던 그 말을 우연히 경험했을 때, 형언하기 힘든 위로를 느꼈다. 그 찰나에 서로의 마음을 지키는 집이 세워 올려졌다. 하지만 비대면 이후로 우린 이렇게 마주칠 때를 빼곤 각자 흩어져 앓고 있다.

강의실이 불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현실로 구현할 수 없는 가상현실만의 특성이 있듯, 가상현실로 구현할 수 없는 현실만의 것들이 있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둘이 같아질 수는 없다. 여기에는 논증이 필요 없다. 자두와 코끼리가 다르듯 둘은 그냥 다르기 때문이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장점을 극대화하려면 각각이 할 수 있고 없는 게 무엇인지 고민해야만 한다.

비대면 교육의 강점이자 약점은 시공간이 공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숱한 연구가 우리 몸이 같은 시공간을 점할 때만 가능한 지적, 정서적 교류를 밝혀왔다. 그런 한계로 인해 전면적인 비대면 교육은 참여자들의 자유 대신 신자유주의적 속박을 강화한다는 연구도 쌓여왔다. 비대면 수업이 불완전한 역사적 산물인 강의실을 다양하게 보완해주겠지만 대체재가 되긴 힘들다는 뜻이다. 신형이 모든 걸 구형으로 만든다는 생각은 자본이 빚어내는 환상이다. 이를 직시하고 기술의 문제와 용법을 살피는 것은 ‘반동’이 아니라 기술을 이기로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비대면 기술을 위시한 4차 산업 기술이 코로나19 이후 시대의 해법이라는 주장은 그 과정을 건너뛰었다는 점에서 극히 단면적이다. 팽배한 우울감부터 기초학력 저하, 갈수록 열악해지는 플랫폼 노동 환경까지, 우린 비대면 기술을 무조건 확대하면 오히려 현실이 더 망가진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작년만 택배 상자 33억여 개가 쓰였다. 심리학계에선 줌 부작용 연구가 한창이다. 그럼에도 근래의 비대면 담론은 눈부신 미래의 이미지로 현실을 덮고만 있다. 결정적으로, 신기술 만능론은 지금의 생태 위기를 부른 논리다. 주지하듯 인수공통감염병은 바로 그 생태 위기의 산물이다. 기술 첨가가 우리의 구원일 수 없는 이유다.

변화는 의식의 전환에 달려있다. 기술의 선함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신기술이 운명론적으로 수용해야 할 절대선이라는 신화는 우리가 그동안 그 윤리적 책무를 방기하게 했다. 그러나 우린 기술을 군사 작전처럼 확대한 뒤 후회하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고, 더는 그럴 여력이 없다. 기술 설계에 사회적 가치를 담고 적용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는 것은 공생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선택이다.

그 이상의 변화는 사유의 성역을 줄여가는 데 달려있다. 이 글에 기술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내용은 없다. 인간의 어떤 활동도 사회의 풍요로움을 홀로 담보할 수 없기에, 각각은 건설적 비평을 요한다. 기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따라붙는 검열과 자기 검열이 우리가 기술정(technocracy)을 살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 체제가 당연시될수록 기술이 세상을 위하기보다 해하기가 쉬워진다. 정치, 경제, 예술, 학문에 그러하듯 우린 기술에도 질문을 허해야 한다. 퇴행은 숙고가 아니라 맹신에서 나온다.

질문은 ‘발전’에 대한 재정의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기술의 폐해를 불가피한 희생으로 포장하며 불도저처럼 내달리는 모델은 코로나19를 끝으로 시효를 다했다. 지구의 모든 동승자들을 이롭게 하는 기술 활용법은 근대의 단선적 발전관을 넘어서는 상상들로부터 자라날 것이다.

그리하여 또 하나 분명한 게 있다. 팬데믹 종식 뒤 가상현실 대신 먼저 현실로 돌아가는 것은 퇴보가 아니다. 그것은 치유와 변혁을 향한 첫걸음이다. 기술 악마화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오류인 기술 신성화에서 벗어날 때, 코로나19를 신산업을 위한 호재가 아니라 의식의 전기로 삼을 때 우린 비로소 새로운 미래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마스크를 벗는 날은 어떤 모습일까. 서로의 미소를 눈에 벅차도록 담으면서도 미래를 위한 열띤 토론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날은 아직 요원하므로, 안전한 비대면의 방식으로 독자 분들께 글월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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