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후 부편집장
이연후 부편집장

평생 유보하는 말하기를 쓰며 살아왔다. 예컨대 “제가 잘 몰라서~” “틀릴 수도 있지만~” “~한 것 같아요” “내가 이상한 거야?” 등등의 말버릇 말이다. 어쩌면 이 말버릇을 상대를 존중해주기 탁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혹은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모종의 무의식적인 노력일 수도 있다. 다만 이런 말하기는 내가 을을 자처하면서 시작되기에 존중받기 어렵다. 전문성은 물론, 단호함은 저 멀리에 있을뿐더러, 나조차 말하면서 내 감정과 생각을 의심하는데 어느 누가 내 말에 귀 기울여 주겠는가. 

나는 항상 모든 일을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몇 년간 골똘히 생각해본 끝에 바로 앞서 설명했던 말하기 방식이 내 자책을 강화한다고 결론지었다. 나를 의심하고 검열하는 건 내 모든 것에 확신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하기 방식을 선택하게 된 근원이 궁금해진 탓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봤지만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했다. 아득히 멀고 지금은 가물가물해진 기억들 사이에서도 내 말버릇이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 삶 속에 있는 공통분모를 찾아봤다. 여러 후보가 있었지만, 나는 그중에 내 비주류성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비주류 인간으로 살면서 위축된 말하기를 하고, 모든 것에 확신 없이 살 수밖에 없는 걸까? 그렇게 평생을 보내긴 싫은데, 비주류를 사랑하는 나를 억압하면서 주류에 속하고 싶지 않다.

끙끙 앓던 중 여성들은 자신의 감정까지 허락 맡고자 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는 논지를 여러 사례를 끌어와 설명한 글을 봤다. 그 사례는 내 말버릇과 동일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 안도하면서도 이것 또한 놀랍게도 “내가 이상한 거야?”의 연장선이었음을 깨닫고 또 자책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기로 했다. 일단 이게 사회적 문제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봤다. 내게 이런 언어를 선택하기를 남몰래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수 있다. 비주류의 인간이 큰 목소리를 내는 걸 달갑지 않게 보는 사람이 분명 있기에, 차곡차곡 쌓여온 내 경험들이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는 나’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회적 분위기를 개선하기 전에 나부터 바뀌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애초에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 비주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를 가능성이 허다하다. 그래서 우선 아까 찾았던 내 언어의 문제점을 고쳐보기로 했다. 

자신의 감정을 허락받으려면 언어를 매개로 해야 한다. 위축됨을 선보이기에 가장 좋은 방법도 언어다. 소리로 전달되든, 텍스트로 전달되든 나 또는 타인에게 불가피한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유보적 말하기는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와 더욱 견고한 소심함을 만들어내고, 견고해진 소심함은 또 다른 유보적 말하기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니 “~한 것 같다”라는 애매한 발언에서 벗어나 “~입니다”라고 말해보자. 모든 위축된 소수자들이 힘을 모아 확실한 목소리를 내보자. 앞으로 수많은 발언대에서 나 또한 유보적 말하기를 버려볼 테니, 당신들도 멋지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비록 변화는 한두 명만 해당할지라도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는 건 그 한두 명이 시작해야만 가능하다. 그렇게 계속 우리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고 드러내다 보면 다른 비주류 인간들이 더는 자기 생각을 검열받지 않아도 될 때가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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