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우 취재부장
박건우 취재부장

여느 날처럼 낙성대역으로 향하는 2호선 지하철 안이었다. 그래도 금요일 오후 3시쯤 서초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공간이 넉넉한데, 오늘은 유독 애매하게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방배를 지나 사당에 가까워질 때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문 앞에 서 있었고, 뒤에 내릴 사람들이 환승복도로 뛰쳐나가기 위해 출입문 쪽으로 옹기종기 모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비켜줄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최대한 길을 내주기 위해 지하철 손잡이 쪽으로 몸을 붙이는 순간, 빨간 옷을 입은 한 중년 여성이 내 어깨를 강하게 쳤다. 서울의 악명 높은 지옥철에서는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라 “이 사람 역시 내리려고 하는구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그는 내리면서 보란 듯이 나를 다시 긁고 지나갔다. 내릴 공간도 여유로웠는데 굳이 내 쪽으로 와서 두 번이나 나를 치고 간 것은 고의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었다. 하마터면 나도 같이 내릴 뻔했다. 고의라는 확신에 찬 나머지, 본능적으로 그쪽을 째려봤다. 불쾌함을 강하게 어필하는 눈초리를 준 뒤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 순간 그다지 멀리 나가지 못한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는 흰 지팡이로 좌우 바닥을 번갈아 내리치며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면서 애써 노려보지 않은 척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내 행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었겠지만, 죄책감이 물밀 듯 밀려왔다. 

나름 내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이 내 치부 하나를 드러낸 것 같다. 점잖고 진중하면 좋은 것 아닐까. 적당한 수준이라면 맞는 말이겠지만, 이런 신중한 성격은 어느 순간 ‘확신’의 단계에 다다를 때 도리어 내게 독이 되는 것 같다. 도박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아마 나는 돈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다 잃을 것이다. ‘확신’이 있으면 베팅을 하기 때문이다. 도박에서 확신을 가질 만한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지만, 단 한번의 확신만 있으면 불도저처럼 들어간다. “내가 확신할 정도면 틀림없는 사실이야”라는 환상이 뇌리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확신에 차면 주변을 잘 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돌이켜보면, 내가 확신했던 일이 결론적으로는 틀려 얼굴 붉힌 일이 종종 있었던 것 같다.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 못한 탓이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그 사람은 경험적으로 이 사실을 확실히 일깨워준 듯하다. 시각장애인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공간도 많은데 두 번이나 나를 쳤으면 분명 고의일거야’라는 확신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의 마지노선이었다. 한번 확신에 차니 다른 생각이 안 들었나보다.

영화 <월드워 Z>의 원작 소설인 「세계 대전 Z」에는 향후 발생할 질병을 경고하는 ‘바름브룬 나이트 보고서’가 등장한다. 이 보고서가 작성되는 과정은 꽤 인상적이다. 이스라엘 정보부의 분석관 9명이 보고서에 대해 같은 의견을 내면, 열 번째 분석관은 이유를 불문하고 반드시 반대해야 한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진실을 발견할 때까지 정보를 파헤치는 것이다. 바름브룬 나이트 보고서도 그런 최후의 의심에서 비롯됐다. 팩트체커들을 동경하며 꿈을 키웠던 지난날을 다시 생각한다. 무턱대고 확신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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