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행정학과 석사과정)
김현석(행정학과 석사과정)

김승옥의 현대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이는 극중 스물다섯 살로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주변 지인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아무런 반응이나 저항 없이 무기력하게 외면해버리고 마는 젊은 자신들에게 던지는 대화이다. 산업화가 태동하던 그 무렵, 급격한 사회 변화로 혼란을 겪는 아노미적 가치 상실과 박탈감, 소외감, 심화되는 개인주의 등으로 점차 인간미를 잃어가는 황폐한 도시적 삶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서울, 2021년 가을’. 우리는 어떤 자화상을 그리고 있을까. 우리는 이미 국제적으로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됐고, 지난해에는 구매력 기준으로 환산된 1인당 GDP가 일본을 앞질러 이제는 영국을 넘볼 만큼에 이르렀다. 그럼 이제는 그때 잃어버렸던 인간미를 회복하고 심리적 안정기를 거쳐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사회 갈등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는 민사소송제기 건수의 경우, 2019년 기준 연간 470만 여건으로 일본과 EU 주요국들보다 높고 자살률은 OECD 국가 1위, 심지어 아동·청소년의 삶 만족도조차 최하위에 이른다. 또한 2016년 우리나라 갈등 지수는 OECD 국가 3위를 기록했다는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갈등과 분노와 스트레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 것일까.

한편 최근 들어 눈에 띄는 것은 ‘분노조절장애’라는 단어가 언론 등에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갑자기 화를 내는 특정인을 지칭할 때, 욱하는 성질, 다혈질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말았지만, 요즘에는 사회 전체적으로 위험하리 만큼 욱하는 성질들이 난무하고 있다. 2018년 국감자료 등에 따르면, 4대 범죄 중 우발적 범행 비율은 30%대에 육박하고 있고, 보복운전 신고건수는 연간 5,500여건을 기록하고 있으며,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소위 ‘묻지마 범죄’가 계속 발생한다는 점도 이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언힌지드〉(Unhinged)도 바로 그런 장면을 잘 묘사해낸다. 자신의 뒷차가 경적을 크게 울렸다는 이유만으로 보복운전을 넘어 상대방의 가족들까지 쫓아가 극한의 테러를 저지른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분노조절장애’는 순간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되는 본능적인 감정이 통제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즉, 평상시 누적돼있던 스트레스가 무언가에 의해 촉발되면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화를 쏟아내게 되는 것이다. 화가 있을 때 다스리지 못하는 능력, 그것에는 정신적 외상, 호르몬의 불균형 등 여러 의학적 원인들이 있겠지만, 그 후천적 요인 중 하나는 내가 옳다고 정해놓은 생각이 ‘지금 바로 당장’ 이뤄져야 한다는 고집 때문은 아닐지 상정해본다. 내가 원하는 것이 ‘지금 바로 당장’ 이뤄져야 한다는 정답을 정해놓고 상대를 대한다면, 네트워크로 구성된 복잡계의 현대사회 속 우리들의 갈등과 스트레스는 쉽게 없어지기 힘들다. 우리에게는 기다릴 줄 아는 미덕이 필요하다. 어느 순간 훌쩍 커버리는 콩나물조차도 역치 값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정책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관점이 있다. 시차이론(時差理論)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정책이 집행되고 나서 그 효과를 보려면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는 ‘지금 바로 당장’의 단기적 평가를 통해서는 단순 산출물(Output)이 아닌 중장기적 관점의 영향력(Impact)은 측정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시간은 그 무엇에게도 필요하다. 그리고 성숙되고 완성되기까지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성미가 급한 나머지 기다림을 통해 또 다른 것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성을 내다볼 줄 아는 혜안(慧眼)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무언가의 상실을 고발하던 1964년과 2021년의 모습이 마치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고정관념과 정형화된 틀 안에서 정답을 정해놓고 상대에게 갈구하다가, 정작 무엇이 정답인지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내 안의 작은 파랑새만을 찾다가 정작 우리 눈앞의 더 큰 파랑새를 놓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럴 바에는 오늘 하루만큼은, 큰 마음먹고 작은 파랑새쯤은 차라리 자유롭게 날려 보내는 것은 어떨지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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