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연(사회학과 석사과정)
임재연(사회학과 석사과정)

“요즘에는 갓난아기 우는 소리를 듣기가 힘들어” 세미나에 가기 위해 걸어가던 내 귀에 누군가의 말이 들렸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영화나 TV를 통하지 않고 갓 태어난 아기가 우는 소리를 실제로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별생각 없이 넘겼던 어떤 아주머니의 말은 며칠 동안 내 머리에 맴돌았다. ‘그러게, 근처에 어린이집도 있는데 왜 아기 우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까?’ 며칠간 이어진 고민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갓난아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라진 아기 울음소리를 포착해 낸 아주머니도, 나도, 우리 모두는 갓난아이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0.84.’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이다. 15세부터 45세까지 가임 여성 한 명이 평생 가질 것으로 기대되는 아이의 숫자는 이미 20년 전 1.3명 이하로 진입해 OECD ‘초저출산’ 기준을 넘긴 지 오래다. 재작년부터는 1.0명, 작년에는 0.9명 밑으로 떨어져 한국 사회에 위기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머지 않은 미래에 한국은 소수의 청년이 다수의 노인을 부양하는 사회가 될 공산이 크다. 기대 수명은 늘고 생계는 더욱 어려워지는데, 사회보장제도는 미흡한 와중 노동인구까지 줄어드는 사회. 합계출산율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정부는 여러 대응책을 펼쳤지만, 결실을 거두기는커녕 젊은 층의 반감을 사 문제를 악화시켰다. 최근 확산되는 비혼, 비출산 담론으로 출생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갖기는 더 어려워졌다.

무엇이 문제일까? ‘헬조선’에서 누가 자식을 낳고 싶겠냐는 자조는 더 이상 시선을 환기하지도, 문제 해결에 기여하지도 못한다. 한 사회의 재생산이 이토록 심각한 덫에 빠져 있다는 것은 이것이 정교한 학술적 접근을 필요로 하는 문제임을 시사한다. 출산은 다방면에 걸친 요인들이 상호작용해 도출된 복합적 결과물이다. 사회학 분과 내에서 청년들의 출산 행위를 연구하는 필자가 보기에 이 문제의 핵심은 ‘집’과 ‘평등’에 있다. 아이를 낳을 집이 없고, 양육 과정에 평등이 없으면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젊은 세대가 인식하는 한국 사회에는 집도, 평등도, 그리고/그래서 아이들도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아이를 낳고 싶은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주거를 보장하고, 양육 과정에서의 평등을 달성하면 된다. 물론 이렇게 간단히 적은 것처럼 쉬운 과정은 절대 아니다. 당장 주거 안정화를 이루는 데만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데다, 양육 과정에서의 평등은 사회 전체의 노동시장 및 가치관 구조와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변화가 어렵다. 그럼에도 희망을 걸어볼 구석은 있다. 한국 사회는 가치관의 변동이 매우 빠르기 때문이다. 필자의 분석에 따르면 10년 전에 비해 한국에서 전통적 가치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는 현격히 감소했으며, 오늘날 절반 이상의 청년은 가족에 대한 평등주의적 가치관을 지지한다. 물론 개인의 가치 지향과 실제 삶 사이에는 괴리가 있을 수 있다. 평등을 지향하더라도 사회적 구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가치관은 공허한 환상으로 흩어지고 만다.

결국 극심한 저출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평등주의적 가치에 따르는 삶을 실제로 선택 가능하게 만들도록 사회 구조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주거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평등한 양육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장벽을 부숴나가야 한다. OECD국 중 최상위 수준의 장시간 노동, 성별에 따른 임금 격차와 승진의 제약, 여성의 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직장 내 문화와 경력 단절. 양육과 일이 양립 불가능함을 기정사실화하는 일터의 상황은 출산을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일과 가정 중 한 가지를 선택할 것을 은연중에 지속적으로 강제한다. 개개인의 사적 관계 내에서의 평등 또는 불평등은 일터에서 그들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양육과정의 평등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은 곧 노동시장에서 두 사람이 놓인 처지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함축한다. 가족이 함께 살 집과, 일터에서의 평등. 이 두 가지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는 앞으로도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적막한 공간으로 머무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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