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문화 분권의 개념과 앞으로의 과제를 톺아보다

지난 7월, 고(故) 이건희 삼성 전 회장의 소장품이 전시될 미술관이 서울에 들어서기로 결정되면서 ‘문화 분권’이 화두에 올랐다.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의 일방적인 결정에 지자체들은 정부가 강조했던 균형 발전에 어긋난다며 반발했고, 문화 분권과는 멀어진 결정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들이 요구하는 문화 분권이란 무엇이며, 진정한 문화 분권을 위해 선행돼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대학신문』은 문화 분권의 필요성과 방향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문화 격차의 실상과 문화 분권의 필요성

서울과 지방의 문화 격차는 이전부터 계속 지적돼온 문제다. 전북연구원의 장세길 연구위원은 “수도권과 지방의 문화 격차는 양이 아닌 질에서 결정된다”라며 “인구당 문화시설 수로 보면 지방에도 문화 공간이 충분히 존재하는 것 같지만, 장비가 노후화돼 실질적으로 공연을 올릴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장 연구위원은 “서울에 위치한 예술의전당과 전주·익산의 문화회관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하늘과 땅 차이”라며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거리가 먼 서울까지 가야만 질 높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 문화 격차의 실상이라고 밝혔다.

이런 문화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문화 분권’이다. 문화 분권이란 중앙에서 하던 문화 행정을 지역으로 이양하는 것을 넘어 지역 문화를 스스로 발굴, 기획,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노영순 문화예술정책연구실장은 “문화 분권의 핵심은 지방에 자율성을 주는 것”이라며 “정부는 지역에서 향유하는 문화의 최소치를 제공할 뿐, 그 지역만의 특색 있는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은 지자체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를테면 탑다운(Top-down) 방식으로 중앙에서 예산과 함께 전달된 문화 정책은 지방의 기반 시설 부족으로 인해 성공적으로 운영되기 어렵다. 장 연구위원은 “오히려 지방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수도권에서 잘 된 공연보다는 동네 생활문화시설을 활용한 특색 있는 콘텐츠”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중앙과 지방의 문화 격차를 줄여나가는 데 문화 분권은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중앙이 아닌 지방이 주도하는 문화 사업

문화 분권을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역의 특색을 살린 문화 콘텐츠를 발굴하기 위해 ‘바텀업’(Bottom-up) 방식으로 문화 정책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노 실장은 지방에서 스스로 사업 계획을 짜고 예산이 부족한 경우에 중앙의 지원을 받는 방식을 제안하며 “지역 스스로가 잘하는 부분은 지자체가, 그렇지 못한 부분은 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중앙과 지방의 적절한 거리두기가 유지돼야 한다”라고 방향성을 제시했다. 구조의 개선과 더불어 지역의 자체 역량 활용을 위한 꾸준한 노력도 동반돼야 한다. 장세길 위원은 “지역 언어인 사투리도 그 지역에서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며 지역 특화의 일례로 언어를 들었다. 장 위원은 “문화 중앙화에서 분권, 더 나아가 문화 자치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지역 스스로가 문화를 발굴하고 향유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돼야 한다”라고 제언했다.

한편, 김규원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선임위원은 바람직한 문화 분권의 모델을 프랑스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프랑스는 중앙 중심의 ‘문화 분산’ 정책에서 지역 문화의 특화에 초점을 맞춘 ‘문화 분권’ 정책으로 변화해왔다. 중앙은 최소의 문화 정책만을 제공하고 지역 브랜드화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이때 분권의 핵심은 예산 분리와 인력 충원에서부터 출발한다. 프랑스에서는 지방자치단체 간의 협력법인(EPCI)의 등장으로 지역 문화예산이 정부 예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증가하면서 지방이 자율적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게 됐다. 김 위원은 “문화재 관리나 현대 미술 전시와 같이 예산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분야는 국가 차원의 관리가 필요하지만, 그 외의 분야는 문화 행정 전문가를 지방에 지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했다. 반면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문체부가 생기면서 1992년도부터 문화 분권의 시초가 마련됐으나, 아직도 많은 부분이 국가 예산과 보조금에 의존하며 지자체가 중앙 정부로부터 하달받은 지시를 수행하는 구조”라며 한계를 지적했다.

 

문화 분권을 위한 시야의 확장

지방의 자율성과 특색을 살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웃 지자체와의 협력을 통해 문화 콘텐츠를 다양화하는 것 역시 문화 분권을 위한 주요 과제다. 김규원 연구위원은 프랑스, 독일의 문화 분권 정책에서 벤치마킹해야 할 부분으로 지방과 지방의 연계 협력을 꼽았다. 김 위원은 “경기도 안양시와 과천시가 협력해서 무용대회를 나가거나, 강원도 원주시와 평창군이 같이 문예회관을 짓는 것 같은 움직임이 더욱 확장돼야 한다”라며 중앙정부가 지역 협력의 마중물을 내어주어야 함을 강조했다.

광역자치단체의 역할도 중요하다. 노 실장은 “광역자치단체가 기반 역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기초자치단체를 끌어주는 조력자가 돼야 성공적인 지자체 간 협력이 이뤄질 수 있다”라고 주장하며 ‘경기만 에코뮤지엄’을 모범 사례로 꼽았다. ‘경기만 에코뮤지엄 사업’은 경기만에 걸쳐있는 기초자치단체들도 동참해 경기도와 그 주변지역의 자연·문화유산을 발굴·기획·보존하기 위한 범지자체 협력사업이다. 노 실장은 해당 사업이 지역의 특색을 살릴 뿐만 아니라 경기도라는 광역자치단체 주도 하에 다양한 지역의 문화 진흥을 꾀한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김 위원은 “기존의 문화 분권이 중앙과 지방의 관계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지방과 지방의 관계에도 주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라며 “지역 간 협력 시 예산을 더 많이 주는 방향으로 지역문화진흥법을 개정하자는 논의가 오가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중앙과 지자체의 관계를 쇄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역 문화의 발전을 위해 지자체 간의 연계를 더욱 긴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국 사회에서 ‘문화’라는 의제는 정치, 경제에 비해 부수적인 차원으로 여겨지며 비교적 경시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문화의 사회적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문화 격차 해소라는 일차적인 목표를 넘어 지방 문화 자치를 통해 지속가능한 문화 발전의 길이 펼쳐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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