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연 사진부장
김가연 사진부장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에는 유미의 행동을 결정하는 세포들이 등장한다. 유미가 배고프면 출출 세포가 피리를 불어 꼬르륵 소리를 내고, 유미가 좋아하는 남자와 만날 때면 이성 세포, 감성 세포, 사랑 세포 등 여러 세포가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성공적인 데이트를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세포들 중 가장 월등한 능력을 가진 ‘프라임 세포’의 존재였다. 유미의 프라임 세포는 ‘사랑 세포’였다. 사랑 세포는 다른 세포들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어떤 상황에서도 유미가 사랑을 쟁취할 수 있게 분주히 움직인다.

귀여운 세포 캐릭터들을 보니 자연스레 나의 프라임 세포는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걱정을 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하고, 선택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편이라 ‘불안 세포’가 나의 프라임 세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보니 나는 낭만을 좇는 사랑꾼도, 냉철한 이성주의자도 아닌 그저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왜 특색 있는 프라임 세포를 갖지 못한 사람일까. 어쩌면 나를 대표하는 근사한 정체성을 꼽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시대를 넘어 자신만의 색깔이 생존 경쟁에서 무기가 됐기 때문이다. 남들과 나의 색깔을 비교하며 애써 더 많은 색깔을 덧칠하다 보면 오히려 검은 색으로 물들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한참을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무엇 하나 특출나지 않은 내 세포들이지만 모두 소중한 나였다. 신중히 선택해야 할 상황에 불안 세포가 튀어나와 최선의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불안은 결국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때로 불안 세포보다 앞서는 자신감 세포가 소소한 성취를 맛보게 해주고, 사랑 세포가 과감히 손을 내밀어 마음을 전달하게 해주어 나는 행복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렇게 꼭 근사한 프라임 세포를 선정하지 않더라도 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은 모두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정말 당연한 말이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를 온전히 깨닫고 나다운 삶을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삶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을 이루고자 하는 수단을 좇다 보면 수단이 목적에 앞서는 목적 전치 현상이 발생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서점의 베스트 셀러 구역에 항상 위로가 되는 에세이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자기계발서들이 줄 서있는 것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씁쓸했다. 그만큼 우리가 스스로를 따듯하게 품어주지 못한 채 부족한 나를 자책하고, 남과 비교하며 위축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존엄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복잡하게 엉켜 있는 생각 조각들이 나를 모나 보이게 만들어도,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결국 나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라고 말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더불어 사는 삶, 즉 남을 사랑하며 배려하는 삶은 결국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은 이기주의로의 도피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바쁜 일상에서 쉽게 무너질 수 있는 현대인의 마음을 데워줄 작은 불씨를 지피고자 한 것이다. 나의 세포들을 포함해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나아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려보자는 것이다. 좋거나, 더 좋은 삶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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