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채림(인류학과·18)중앙환경동아리 씨알
윤채림(인류학과·18)

지난달 28일 씨알 친구들과 둘러앉아 환경문제로 인해 ‘내 삶’이 피해를 보거나 손해를 본 경험, 혹은 환경문제의 영향이 간접적이 아닌 직접적으로 와닿은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해봤다. 공통으로 나온 것은 미세먼지였고, 그러고는 다들 계속 말을 뱉다 말았다. “아니 해녀분들은…” “아 맞다, 내 얘기를 하기로 했지” “아니 근데 건설 노동자분들은…” “근데 우리가 건설 노동자는 아니잖아” “그치...” 결론은 우리는 농사를 짓는다거나 어업을 하는 등 자연에서 노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변화하는 지구를 잘 느끼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환경문제에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워하며 움찔거리는 우리를 돌아봤다. 스스로에게 ‘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님에도 네 것처럼 아파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인간은 타 생명체의 고통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모든 생명체는 쾌고감수능력이 있고, 우리는 타 존재의 능력을 인정한다. 그래서 내 삶에 나타난 사건과 문제가 아니더라도 잘려나가는 나무의 절망감을 느끼고 도축되는 동물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사람들, 하루하루 사막이 돼가는 땅을 바라보는 사람들, 폭우로 불어난 물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삶을 보고도 모르는 척할 수 없게 됐다. 이 땅에 태어나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삶은 잔혹할 수 있음을 느낀다. 의무랄까, 부채랄까. 할 수 있는 게 없을지 기웃거리고 울상짓고 소리 내게 된다. 우리는 모두 같은 땅 위에 서서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기 때문이다.

환경 동아리를 한다고 하면 다들 우리가 ‘환경’에만 관심을 갖고, 기후위기를 탐구하고자 하는 줄 안다. 환경 문제는 자연의 영역이고, 그것은 인간이 통제 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기술이 발전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들은 ‘어떻게 타 존재의 고통을 감각하고 도와주는 존재로 사람들을 이끌어갈 것인지’로 귀결한다. 자신의 삶만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 벽을 쌓는 사람에게 어떻게 타 존재의 소리를 들어보라고 손을 내밀지 고민한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1등이었기 때문에 여기서도, 저기서도 1등이고 싶다. 1등이기 위해선 가끔은 잔혹해져야 하고, 스스로를 밀어붙여야 하고, 성취하고,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해 달려야 한다. 내 이익은 내가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겨줄지 모르고, 우리의 어깨는 부모님과 친구들의 기대, 미래의 나에 대한 기대로 진물이 난 지 오래다. 그렇게 이뤄낸 것들은 과연 세상에 무해할까? 나는 돈을 벌어서 무엇을 구매하고자 하는 것일까. 재화를 획득하는 방식은 타 존재를 착취하지 않고 가능한 것일까? 나는 지구에 생채기를 내지 않고 나를 챙길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가 달려가고 있는 이 길은 윤리적일까. 이런 고민들은 내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시초가 됐다. 모두가 함께 서 있는 지구 위에서, 타 존재를 해치지 않으며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혼돈의 세상 속 서로의 존재를 지탱해주기 위해 씨알에 친구들과 함께 있다. 이 땅 위에 무해한 내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감각은 오늘의 나를 살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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