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현 기자(뉴미디어부)
박창현 기자(뉴미디어부)

인생이란 뜻밖의 일의 연속인 듯하다. 나는 내가 이렇게나 오랫동안 한국에 남아있을 줄 전혀 몰랐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유학을 준비했기 때문에 당연히 외국살이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래저래 꿈은 좌절됐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때마침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의 전 세계적인 유행은 실패의 쓴맛을 한동안 잊게 해줬다. 그럼에도 지금 돌이켜 보면 대학에서의 첫 학기는 상당히 우울했다. 사실 팬데믹은 핑계였고, 학기 내내 심각한 자기 부정의 늪에 빠져 지냈던 것 같다. 어차피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니까 공부도 적당히, 사교도 적당히, 하지만 〈더 크라운〉 시청은 열심히. 나의 감정 변화가 한창 롤러코스터보다 더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오르내리던 중 문득 이렇게 살다가는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보다도 더 망가지겠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당장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때 내 앞에 『대학신문』 공채 모집 공고가 마치 동아줄처럼 나타났다. 만약 내가 지원할 당시 뉴미디어부가 신설되지 않았다면, 혹은 면접 경쟁률이 높았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나처럼 면접 직전에 황급히 학보사 유튜브 계정에 올라온 영상 기사들의 제목만 훑고 들어가는 지원자는 없길 바란다. 하여튼 나는 코로나19 시국에 사람의 온정 및 소속감을 느끼고 싶다는 알량한 목적으로 입사했다. 따라서 나에게 학보사 생활은 또 하나의 우연이었다. 물론, 다큐멘터리 PD를 미래의 업으로 삼으려던 계획을 고려하면 나는 상당히 앙큼한 선택을 한 셈이다. 그래도 ‘기자’는 단 한 번도 꿈꾼 적이 없었기에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는 전체 회의는 새롭기도 하고 한편으로 무료하기도 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마저도 아득한 추억이 된다. 현재 나는 퇴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학보사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나는 교환학생 자격으로 올해 말 미국에 간다. 그런데 이마저도 우연히, 정확히는 홧김에 결정됐다. 1순위로 적은 학교에 붙을 리 없다며 재미 삼아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했는데 덜컥 합격해 버렸다. 이제는 내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일들이 정말 뜻밖의 일인지 진지하게 재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성에 안 차면 금세 포기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우연’이라는 방패막을 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직도 자기 부정의 악습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하지 않았나. 한 번의 성찰로는 부족하다. 결국 가장 중요한 전환의 기로에서 내 인생의 방향은 나의 의지로써 결정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뇌어야 한다. 유목 생활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기자였던 나를 위해 조금의 항변을 하고 싶다. 처음에는 우연 같았던 기자 생활이 나중에는 도전이 됐다. 이런 심정의 변화는 올해 초부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시작됐다. 프리미엄 다큐멘터리는 이전 뉴미디어부장이 추진했던 『대학신문』 리브랜딩 사업의 일환으로, 스낵 영상보다는 더 진지한 영상 저널리즘을 추구하고 싶어 내가 맡았다. 학보사 차원에서도 선례가 없었으므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이라는 촉박한 제작 기간 안에 기획부터 촬영, 편집까지 네 명의 적은 인원이 전부 해결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막막한데, 그 당시에는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치웠나 모르겠다. 밤낮 가리지 않고 방학을 몽땅 다큐멘터리 제작하는 데 투자해 버린 결과 다소 엉성한 영상물들과 학기 중의 슬럼프를 얻었다. 그 영상 시리즈가 바로 박완서 작가 타계 10주기 3부작인데, 1부를 『대학신문』 유튜브 채널에 게재하고 나서 박완서 작가에게 굉장히 미안해하던 기억이 난다.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박완서 특집은 실패했다. 그렇다면 낙담하지 말고 그로부터 배운 교훈을 다음 프로젝트인 능력주의 기획에 적용하면 그만이었다. 과연 나는 상황을 개선하는 데 성공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능력주의 기획 1부 크레딧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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