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한 인간의 초상을 그리다
나약한 인간의 초상을 그리다
  • 윤채원 기자
  • 승인 2021.10.10 0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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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내문화 | 연극 〈바람 13:1〉

‘안타까움’. 지난 3일(일)에 막을 내린 사회대연극당의 제48회 정기공연 〈바람 13:1〉은 이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바람 13:1〉은 장기기증이 이뤄지는 과정을 수혜자와 기증자의 죽음이 교차한다는 관점에서 조명한다. 극본·연출을 맡은 이재성 씨(미학과·20)는 “우리는 뇌사나 사망으로 인한 기증자의 등장을 수혜자에게 나타난 기적쯤으로 생각하지만, 반대편에서는 가족의 죽음이자 끔찍한 사고다”라며 장기기증을 소재로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바람 13:1〉 중 아들 은혁의 죽음을 부정하는 진욱의 모습 (사진제공: 사회대연극당)
▲〈바람 13:1〉 중 아들 은혁의 죽음을 부정하는 진욱의 모습 (사진제공: 사회대연극당)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슬프다. 은혁의 부모는 갑작스럽게 은혁의 사고 소식을 듣고 장기기증을 결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들은 끝없이 운다. 은혁의 부 진욱은 은혁이 기계에 의해서라도 아직 숨을 쉰다며, 살아 있다며 죽음을 부정한다. 그러나 은혁의 마지막 소원이 장기기증일 것이라는 은혁 모의 말에 진욱은 끝내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장기기증을 하기로 가까스로 마음을 돌린다.

◇‘13:1’에 담긴 의미=연극은 영혼과의 시간 여행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재성 씨는 “연극은 하나의 고정된 시공간에서 무대 위 이야기의 시공간을 변형하고 파괴할 수 있다”라며 “시간 여행 연출을 통해 시공간의 파괴를 의도했다”라고 말했다. 무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몇 번의 발걸음만으로 연극은 과거로 돌아간다. 무대의 오른쪽에서는 현재의 인물인 은주가 1년 전 은혁 가족이 겪었던 아픔을 바라본다. 은주는 은혁의 죽음을 그의 가족과 같은 입장으로 바라본다. 그녀 역시 13년 전 아들을 잃었으며, 그녀의 딸이 곧 장기기증 수혜자가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은혁의 부모가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부정하다 끝내 받아들이며 생전 소원이었던 장기기증에 동의하는 과정을 은혁의 영혼과 함께 지켜본다. 이 과정에서 은주의 13년과 진욱의 1년은 동등한 아픔의 무게를 지게 된다. 〈바람 13:1〉에서 ‘:’은 두 죽음의 동등함을 의미한다.

한편 〈바람 13:1〉은 ‘바람 13장 1절’로도 읽힌다. 이재성 씨는 “성경을 읽는 것처럼 제목이 읽히도록 만들어 바람이라는 소재가 초월적인 향기를 가지기를 바랐다”라고 설명한다. 극의 초반부에 제시되는 ‘신율성’이라는 신조어는 자율성도 타율성도 아닌 신이 선택한 일인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간의 비참함을 드러낸다. 초월적 향기로서의 바람은 이와 관련된다. 극 중에서 바람은 공기의 흐름, 개인의 소망, 그리고 운명이라는 세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운명 앞에 나약한 인간을 그리기 위해 ‘바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연주자는 무대 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주어진 연주를 한다. 인물들이 왜 음악을 연주해 다음으로 넘어가게 만드냐며 아무리 연주자를 원망스럽게 쳐다봐도 연주자는 연주해야 하는 곡을 연주할 뿐이다. 진욱은 ‘왜 하필 우리여야 하는가’라고 소리치지만, 하필 그들 가족이어야 하는 이유는 애초에 없었다. 단지 그렇게 운명이 정해져 있었을 뿐이다.

 

◇응답없는 종교, 운명 앞의 인간=〈바람 13:1〉에서 종교는 인간의 나약함을 부각한다. 극의 초반부터 등장하는 신부님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줄 것이라는 예상은 처참히 깨진다. 극 안에서 종교는 아무런 답도 제시해주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이 슬픔을 찢어지게 느끼도록 놔둔다. 신의 역할도, 신이 정해놓은 운명의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 그저 가족의 죽음을 겪는 인간의 모습만이 제시되면서 인간의 나약함은 더 극대화된다.

결국 운명 앞에서 스러져가는 나약한 인간의 초상만이 남는다. 만약 극 안에서 종교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우리는 인간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진욱을 연기한 류한상 씨(사회복지학과·18)는 “진욱은 무교였지만, 만약 종교가 있었다고 해도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극 안에서 종교 혹은 신은 인물의 행위 방식을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신은 그저 원망의 대상일 뿐이다. 그는 “오히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듣고 은혁이 장기기증을 결심하게 됐기 때문에 산소호흡기를 자신의 손으로 제거해 은혁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줘야 했던 진욱에게 신은 원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칠 듯한 슬픔에도 이유가 있다면 어느 정도 슬픔이 걷히는 법이다. 그러나 은혁의 죽음은 그저 그래야 하는 운명이었을 뿐, 이유가 없었다. 은혁의 가족은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고, 운명을 수용하는 인간은 나약했다. 이재성 씨는 “극을 보고 장기기증을 하겠다고도, 혹은 하지 않겠다고도 마음먹을 필요가 없다”라고 작품의 메시지에 대해 열린 답을 내놓았다. 연극을 올린 이들은 그저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담담한 조명이 관객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장기기증이라는 소재 이면에 담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은 우리가 과연 운명 앞에서 무엇을 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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