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시인 탄생 100주년

홍승진 선임연구원(인문학연구원)
홍승진 선임연구원(인문학연구원)

세상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이란 기존과는 다른 세상, 또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을 뜻할 것이다.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꿈꾸는 행위는 상상력과 관련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으로서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점은 김종삼의 시에서 이미지의 측면이 중요한 까닭이기도 하다. 상상력(Imagination)이라는 낱말 자체가 벌써 이미지(Image)라는 낱말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는 ‘보는 시선’과 ‘보이는 무엇’의 관계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 즉 새로운 세상의 이미지를 빚어낸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시선’과 ‘보이는 세상’의 양쪽을 동시적으로 새롭게 하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김종삼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세상을 바꾸는 시적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세상에 관한 우리의 시선을 여성주의적인 시선으로 바꾸는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어린이와 약소민족의 세상을 보이게 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김종삼의 시를 더 흥미롭게 읽는 방법 중 하나는 그의 시에 나타나는 여성의 이미지와 어린이 및 약소민족의 이미지에 주목하는 것이다.

먼저 김종삼의 시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여성의 시선 속에 들어있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바꿔야 할 세상을 단지 우리 외부에 있는 대상으로만 여기기 쉽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일은 나 자신, 나 자신의 핵심이 되는 내 정신, 그리고 내 정신의 핵심이 되는 내 세계관(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즉 내 시선을 변화시키는 일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김종삼의 시는 말한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세상을 고정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삼의 시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여성의 시선으로 표현한다. 그 이유를 잘 드러내는 그의 작품으로는, 제목에서부터 여성을 강조하는 시 「여인」이 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그 여인의 시야는 그 어느 때이고 / 그 오랜 동안 / 선량한 생애에 얽히어졌다가 모진 시련만이 겹치어 죽어간 사람들 사이에 / 세워진 아취의 고요이고 / 아름다운 꿈을 지녔던 그림자입니다.” 이 시에서 “그 여인”은 전쟁으로 부모와 집을 잃은 어린이들을 구호소에서 돌보는 여성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거의 없다. 이런 ‘인류사=전쟁사’에서 전쟁을 일으켜온 주범은 남성-성인이지만, 여성과 어린이처럼 전쟁과 아무런 상관없이 “선량한 생애”를 사는 사람까지도 그 전쟁의 끔찍한 고통을 피하기는 어렵다.

전쟁 지향적 시선이 공격해야 할 적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시선이라면, 김종삼의 시에서 표현하는 여성의 시선은 구호소에 모인 전쟁고아들처럼 무고하게 고통받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사 전체에 걸쳐서 남성은 전쟁 지향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요받았다. ‘강한 남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강해져야 하고 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며 남을 짓밟고 남의 것을 빼앗아야 했기 때문이다. 남성에게 강요된 전쟁 지향적 시선으로 보면, 나와 다른 타인은 모두 내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으로 보일 것이다. 이와 달리 전쟁에 아무런 책임이 없음에도 전쟁의 고통을 일방적으로 겪는 여성은, 폭력적인 역사 속에서 자신처럼 죄 없이 희생되는 자들의 고통과 슬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그런 여성의 시선은 역사의 폭력 아래 죄 없이 희생되는 인간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시선이며, 그들의 지극히 선량한 인간성을 제대로 바라보고 주목하는 시선이다.

 

여성의 시선을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는 김종삼의 사유는 인류사 전체를 문제시한다는 점에서, 특정 시대의 현실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참여문학보다 근본적이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남성이 주도한 전쟁의 역사였듯이, 전쟁에서 죄 없이 고통받는 인간의 선량한 인간성에 주목하는 여성의 시선도 인류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그 어느 때이고 / 그 오랜 동안” 지속돼왔다고 김종삼의 시는 말한다. 또한 이 시는 “여인의 시야”를 “죽어간 사람들 사이에 / 세워진 아취”로 표현하는데, 이때 “아취”는 ‘아치’(Arch) 모양의 구조물을 뜻한다. 아치 모양의 구조물은 서로 떨어져 있는 양쪽 끝을 무지개처럼 연결한다. 여성의 시선은 오랜 과거의 전쟁에서 죄 없이 희생된 사람들도 주목했을 것이며 가까운 현재의 전쟁에서 죄 없이 희생되는 사람들도 주목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지배자 또는 권력층 중심의 시선으로 서술돼왔다. 이와 대조적으로 여성의 시선은 선량한 인간성을 간직한 채 희생당한 피지배자의 과거와 현재를 아치형 구조처럼 연결할 수 있다. 여성의 시선을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다는 김종삼의 사유는 지배자의 권력을 중심에 두는 시선이 아니라 피지배자의 인간성에 중심을 두는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전쟁의 역사를 평화의 역사로 바꿀 수 있다는 사유와 같다.

김종삼 시의 여성주의적 시선은 전쟁과 폭력의 역사 속에서 희생되고 억압되며 상실돼온 인간들의 인간성, 그중에서도 특히 어린이와 약소민족의인간성을 새로이 보이게 한다. 인류의 역사 전체는 남성이 주도한 전쟁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성인이 어린이를 억압해온 역사였으며 강대국이 약소민족을 억압해온 역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삼의 시는 여성주의적 시선을 여성만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다만 여성의 역사적인 경험 속에서 생겨난 것으로 표현될 따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종삼의 시 세계가 어린이나 약소민족처럼 억압받는 인간의 인간성을 새로이 보이게 한다는 것은 억압받는 인간이 억압하는 인간보다 무조건적으로 더 인간답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훼손하는 폭력의 논리가 지금까지의 역사를 작동시켜온 ‘중심’이었으므로, 그 폭력의 논리에 따라 희생된 ‘변두리’의 인간들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오히려 더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고 말할 뿐이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김종삼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장편(掌篇)」이 있다.

 

조선 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 「장편」 (1975. 9 ), 전문.

 

작품의 제목인 ‘장편(掌篇)’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매우 짧은 작품 또는 이야기’를 뜻한다. 이 시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조선총독부가 있던 일제 강점기의 일이다. 한 손님당 10전의 밥상을 제공하는 밥집에 거지 소녀가 거지 부모의 손을 이끌고 들어왔다. 그 부모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요즘도 식당에 거지가 들어오면 주인이 사정을 따지지 않고 역정부터 내는 경우가 많을 텐데, 빈민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더욱 심했던 그때는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주인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부모를 이끌고 온 소녀는 태연하게 말한다. 자신들은 구걸하러 온 것이 아니라 돈을 내고 밥을 먹으러 왔다고, 오늘이 부모님 생신이라서 부모님께 식사를 대접하려고 왔다고. 그처럼 태연한 자세로 소녀가 내민 돈은 10전짜리 두 개였다. 10전 밥상 2인분 어치니, 부모에게만 생일상을 드리고 소녀 자신은 굶는 것이다. 소녀는 부모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배고픔을 참아야 했을 것이다. 부모가 시각장애인이므로, 자신이 굶는다는 것을 얼마든 속일 수 있다. 「장편」은 이처럼 짧은 시 안에 이토록 결이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낸, 지극히 아름답고 충격적인 작품이다.

거지 소녀의 이야기는 “주인 영감”이라는 성인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어린이의 이야기이자, 일제의 지배를 받는 약소민족의 이야기다. 한편으로 이 시의 어린이는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성인보다 더 높고 빛나는 인간성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이 “조선 총독부가 있을 때”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는 점은 이 시의 발표 시기가 1975년이라는 점과 의미심장한 연관이 있다. 한국의 1970년대는 1972년부터 시작한 유신 체제로 군사독재 파시즘이 장기화된 시기였다. 그런 시점에 하필 거지 소녀의 이야기를 조선 총독부 시절의 이야기라고 콕 짚어 강조한 것은 당시의 군사독재 파시즘이 일제 파시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비판의식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김종삼이 죽기 직전에 남긴 시 「왕십리」(김종삼이 죽은 지 1년 뒤인 1985년에 공개된 작품)는 나운규와 찰리 채플린이 마라톤 경기를 한다고 표현한다. “하루는 / 도드라진 전차길 옆으로 챠리 챠플린 씨와 / 나운규 씨의 마라톤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운규는 1926년에 영화 〈아리랑〉을 연출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표출했고, 찰리 채플린은 1940년에 〈위대한 독재자〉를 연출해 나치즘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김종삼의 시는 폭력의 역사가 일본 제국주의와 독일 나치즘과 한국 군사독재처럼 시대와 장소를 가로지르며 지속돼왔음을 통찰했던 것이다. 나운규와 찰리 채플린의 마라톤 경주는 시대와 장소를 가로질러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간의 몸짓―김종삼의 시는 그런 인간의 인간다운 몸짓을 예술적인 것, 시적인 것으로 사유한다―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편」은 성인과 강대국이 자신보다 힘이 약한 어린이와 약소민족을 짓눌러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에 맞서 억압받는 인간이 온전하게 지켜내는 인간성을 말한다.

김종삼은 1921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 전까지 일제 강점과 제2차 세계대전 등을 생생하게 목격했으며,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피난을 내려오며 고향을 상실했다. 또한 그는 1984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장기 파시즘 독재 체제를 경험했다. 이런 삶 속에서 시인은 인간의 역사 전체가 온통 인간성을 훼손하는 폭력으로 가득한 것이라고 절감했겠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역사를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으로 비관하지는 않았다. 고향을 잃은 인간이 고향으로 회귀하기를 언제나 꿈꾸듯,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시인 김종삼은 인간의 본래적인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끊임없이 상상했다. 여기에서 비롯하는 김종삼 시의 상상력은 투쟁해야 할 적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전쟁과 폭력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처럼 죄 없이 고통받는 인간의 선량한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는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는 동시에 성인과 강대국이 중심이었던 역사에 의해 훼손된 어린이와 약소민족의 인간성을 인간이 회복해야 할 본래의 인간성으로서 새로이 보이게 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김종삼의 시는 세상을 바꾸는 문학다운 방법을 독창적으로 제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목적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학론은 자칫 문학을 사회 변화의 도구로만 여겨 문학의 문학다움을 간과하고는 했다. 반면 문학의 문학다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학론은 자칫 문학을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취급하고는 했다. 문학사에서 반복돼온 이 두 가지 문학론을 넘어, 그의 시는 문학의 문학다움, 즉 새로운 시선으로 새로운 것을 보는 상상력이 세상을 바꾸는 문학적 방법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망가진 물건이 복잡할수록 그것을 고치기 위한 도구가 더 다양해야 하듯이, 세상을 바꾸는 데는 더 많은 방법이 필요하다. 그중 문학적 방법을 김종삼의 시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오늘 우리가 그의 시를 읽을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삽화: 정다은 기자 rab4040@snu.ac.kr

레이아웃: 이다경 기자 lid0411@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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