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가스라이팅의 의미와 그 쓰임을 짚다

최근 우리 주위에서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심리적 지배’, ‘정서적 학대’ 등 가스라이팅을 설명하는 표현도 다양해 가스라이팅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하고 구별하기 쉽지 않다. 『대학신문』이 가스라이팅의 의미와 이 용어를 둘러싼 논의를 살펴봤다.

 

◇가스라이팅은 어떻게 발생하는가=‘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통제하고 그의 마음을 조종함으로써 판단력과 현실감을 상실하게 만드는 현상을 의미한다. 1938년작 연극 〈가스등〉(Gaslight)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정신분석학자 로빈 스턴의 저서 『The Gaslight Effect』에서 사용되며 특정 유형의 정신적 학대를 칭하는 말로 널리 알려졌다. 최근에는 정치·사회·소셜 미디어 집단 간 관계에서도 한쪽이 심리적 압박을 주며 상대가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현상을 ‘가스라이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야 너두 당할 수 있어 가스라이팅』의 저자 허광훈 씨는 “일반적인 폭력과 달리, 직접적인 갈등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친밀감을 형성한 뒤 교묘하게 가해한다는 것이 가스라이팅의 주된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가스라이팅이 발생하는 데는 위계질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The Gaslight Effect』에 따르면,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주로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가해자의 말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도 모르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된다. 권준수 교수(뇌인지과학과·정신과)는 “실질적인 권력 관계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한쪽이 지배적인 관계에서 가스라이팅이 흔히 발생한다”라며 “상하관계가 뚜렷한 군대나 회사 등의 조직이나, 남성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전통적인 부부관계 등에서 가스라이팅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라고 부연했다.

 

◇‘가스라이팅’에 관한 학술적 논의는?=가스라이팅은 흔히 심리학적인 용어로 알려졌지만, 이 용어가 실제 심리학계나 정신의학계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은 아니다. 권준수 교수는 “실제 정신과 치료에서 환자의 상황을 가스라이팅이라고 명명하고 해결책을 일률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에게 주로 우울, 불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의 정신과적인 증상이 나타나는 특징은 있으나, 치료에서는 환자에게 나타난 현상 기저의 심리적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도와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학술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다루는 개념이 ‘가스라이팅’이라는 대중적인 용어를 통해 더 쉽게 설명되기도 한다. 일례로 여성학계에서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미묘한 억압을 설명하는데 종종 사용된다. 추지현 교수(사회학과)는 가스라이팅이 “일상적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많아지며 디지털 공간에서 확장된 언어”라며 “여성학에서는 강압적 통제(Coercive Control)라는 개념을 통해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통제를 설명해왔는데,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는 이런 과정을 보다 면밀히 포착하는 데 유용한 듯하다”라고 해석했다.

상담심리학의 한 분야인 정신분석학에서 사용되는 ‘투사적 동일시’의 개념 또한 일종의 가스라이팅으로 설명할 수 있다. 투사적 동일시는 방어기제의 일종으로, 가해자의 부정적인 감정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며 그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게 함으로써 피해자를 통제하려는 무의식적인 행위를 뜻한다. 임명호 교수(단국대 심리치료학과)는 “예를 들어 좋은 성적에 대한 부모의 불안을 아이에게 투사함으로써 아이가 성적에 대한 불안과 압박을 느끼게 하는 투사적 동일시를 가스라이팅으로 볼 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가스라이팅에 관한 논의가 시사하는 것들=최근 우리 사회에서 가스라이팅이 끊임없이 문제시되는 것은 가까운 관계에서의 미묘한 정서적 폭력에 대한 인식이 이전보다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추지현 교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갖는 강점은 데이트 폭력, 종교단체, 선후배 관계 등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은밀한 지배력 행사를 문제화한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렇기에 가스라이팅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허광훈 작가는 “가스라이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점점 더 높아지는 만큼 이와 관련된 사회과학적 연구가 더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가스라이팅이 더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는 사례들도 빈번한 만큼, 가족과 같은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나는 가스라이팅에 대해 경각심을 높일 필요가 있다. 일례로 아동학대에서 가스라이팅이 일어날 경우, 피해 아동이 부모와의 분리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워 제대로 분리조치를 취하기 어려울 수 있다. 권준수 교수는 “가족이라는 내밀하고 폐쇄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학대의 문제에 사회 전반이 경각심을 갖고,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에는 그간 사소하게 여겨졌으나 피해자에게 큰 고통을 준 폭력의 경험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가스라이팅에 대한 논의가 단순한 이목 끌기를 넘어, 우리 사회 속의 미묘한 억압과 폭력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학술적·사회적 담론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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