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우 교수(정치외교학부)
송지우 교수(정치외교학부)

미국 교수사회를 그리는 코미디 시리즈 <더 체어>(The Chair)에서 주인공인 영어영문학과장은 강의평가를 읽지 않는 시니어 교수들 때문에 고생한다. 마지막으로 강의평가를 읽은 게 언제냐는 질문에 “1987년”이라고 건조하게 답해버리는 시니어 교수 조언 햄블링은 곧이어 “나는 고객 요구(consumer demands)에 응대하지 않아”라고 선언한다. 이 장면의 묘미는 햄블링이 강의평가의 목적과 용도를 조금은 제대로, 또 조금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데 있다. 

햄블링에게 강의평가란 대학에 보고되는 데이터다. 그리고 햄블링이 보기에 이 데이터는 결함투성이다. 학생들은 피상적인 재미나 학점의 관대함, 심지어 교원의 외모와 같은 잘못된 기준으로 수업을 평가하고, 그마저 성의 없이 하고 만다. 대학은 이런 부실한 정보를 교원 채용, 승진, 조기은퇴 결정에 무비판적으로 반영하고, 교원은 살아남기 위해 학생이라는 “고객”의 “요구”에 그저 “응대”하는 처지가 돼버리고는 한다.

실상이 늘 이렇게 암울하지는 않겠지만, ‘보고로서의 강의평가’가 가지는 한계는 여러 연구에서 지적돼왔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강의평가 점수가 성적평가의 엄격함이나 교원의 인종·성별 등 불합리한 변수의 영향을 받으며 학생들의 실제 학업성취를 예측하지 못하고 소수자 교원에 불리하다는 등의 연구가 다수 발표됐다. 급기야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는 교원 정년보장심사에서 전통적인 강의평가 결과를 반영하지 않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왜곡과 불확실성의 위험을 무시한 채, 가령 강의평가 점수 ‘3’과 ‘4’의 의미를 그저 ‘덜 훌륭한’ 그리고 ‘더 훌륭한’ 교육역량으로 단순화하는 행정 편의주의는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체어>에서 햄블링의 강의는 정말 훌륭하지 못하다. 햄블링은 영혼 없이 앉아있는 소수 학생의 호기심을 전혀 자극하지 못하고, 형식은 대화지만 실체는 독백인 따분한 얘기를 힘겹게 이어간다. 결국 햄블링은 학과장의 성화에 강의평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서야 (스포일러가 될까 상술하지 않겠지만 상당히 독특한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아낸다. ‘보고로서의 강의평가’에 저항하며 햄블링이 외면했던 것은, 강의평가의 다른 그리고 더 중요한 면, 즉 교원과 학생 사이 솔직한 소통 경로로서의 기능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 강의평가는 ‘교육 방법이 효과적이었는지’ 묻는다. 대다수 교원은 물론 스스로 효과적이라고 믿는 교육방법을 쓰겠지만, 그 방법이 정말 효과적인지 알려면 실제 수강생의 의견을 듣는 게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대화로서의 강의평가’는 고유한 유용성을 지닌다.

‘대화로서의 강의평가’가 유토피아를 향한다면, ‘보고로서의 강의평가’는 디스토피아를 내다본다. 신뢰와 성실이 지배하는 유토피아의 대학에서는 교원과 학생의 상호 2인칭 대화만으로도 훌륭한 배움을 이룰 수 있지만, 불신과 불성실이 팽배한 디스토피아의 대학에서 ‘대화로서의 강의평가’는 시간 낭비고 오직 ‘보고로서의 강의평가’만이 (자율성, 타협 없는 진리 추구 같은 가치들을 희생해서라도) 나쁜 행위자를 적발하는 감시 수단으로 쓸모 있다.

특정한 대학의 지향점은 강의평가의 내용과 활용 방법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예컨대 ‘이 수업에서 받은 피드백은 도움이 됐다’ ‘이 수업은 다음처럼 개선될 수 있다’와 같은 문항은 대화를 전제한다. ‘정기 면담 시간이 공지됐다’나, 최근 서울대 외국어강의 평가에 도입된 ‘대부분의 강의가 외국어(원어)로 진행됐다’와 같은 문항은 오직 보고를 전제한다. 지금 대학이 유토피아 건설과 디스토피아 관리 가운데 어디에 무게를 둬야 할지는 물론 숙의를 필요로 하는 까다로운 문제이다. 서던캘리포니아대의 파격이나 팬데믹 국면에서 양적인 강의평가를 제한한 일부 외국 대학의 조치와 같은 사례가 참고할 만한지도 조심스럽게 따져야 할 일이다. 다만 우리 대학이 대화와 보고, 강의평가의 두 기능 가운데 어느 편을 얼마나, 어떻게, 왜 강조하고 있는지 스스로 인지하고 고민하는 일은 당장 시작해도 이르지 않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