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 자연대 교수ㆍ생명과학부

1932년 양자역학을 발전시킨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하이젠베르크에게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원래 수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뮌헨 대학에 입학한 뒤 당시 유명한 수학자의 세미나에 참석하려 했으나, 그 교수로부터 거절을 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대학 교수였던 하이젠베르크의 아버지는 그를 뮌헨 대학의 물리학 교수 좀머펠트에게 소개했고, 좀머펠트는 곧 이 젊은이의 재능을 알아차렸다. 그는 4년 만에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이젠베르크는 고전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고대 그리스 철학에 심취했고,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었어도 될 만큼 피아노를 잘 쳤으며, 등산, 하이킹, 스키, 탁구와 같은 스포츠를 ‘검투사처럼’ 즐겼다. 그는 물리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연에 존재하는 수학적인 조화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보았기에 훌륭한 물리 이론에서는 항상 미적(美的)인 아름다움이 발견된다고 믿었다.

하이젠베르크가 대학에 다닐 무렵 물리학의 세계는 격동기였다. 닐스 보어의 양자이론은 플랑크의 양자 불연속 개념을 이용해서 가장 간단한 수소 원자의 특성을 잘 설명했지만, 헬륨 원자의 특성과 원자의 스펙트럼선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비정상 제만효과는 설명하지 못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당시 좀머펠트의 학생이었던 파울리와 물리학의 문제에 대해 깊이 토론했고, 1924년, 7개월 동안 보어의 코펜하겐 연구소에 머물면서 보어로부터 심도 깊은 물리 이론은 수학적인 깔끔함만이 아니라 철학적이고 물리적인 의미를 함께 지녀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독일에 돌아와서 그는 양자물리학이 실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양들 사이의 관계만을 포함해야 한다는 이론을 주창했고, 이는 곧 ‘행렬역학’으로 발전했다.

비슷한 시기에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을 제창했다. 파동역학의 도전은 하이젠베르크, 보어, 보른으로 하여금 새로운 양자역학의 체계를 신속하게 완성하도록 자극했다. 이 과정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제시했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하면 작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혹은 속도)을 동시에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시간을 동시에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원리 때문에 고전적인 인과율(causality)의 토대가 그 근본에서부터 무너졌는데, 그 이유는 입자의 운동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을 정도의 초기조건을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뉴턴과 라플라스에 의해 완성된 결정론은 파기되거나 적어도 약화돼야 했다.

하이젠베르크와 관련해서 항상 등장하는 얘기는 2차 대전 중 독일 원자탄 개발에 그가 얼마나 관여했는가라는 문제이다. 몇몇 사람들은 그가 핵분열 연구를 하면서 교묘하게 태업을 함으로써 독일 원자탄 개발을 지연시켰다고 주장했는데, 최근에 발굴된 사료들은 이런 해석에 문제가 많음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를 종합해 보면 그는 우라늄의 임계질량을 계산하는 데 실수를 범한 결과 빠른 시간 내에는 원자탄의 제조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원자핵분열 연구를 통해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을 극복하고(그는 ‘유태 물리학’을 한다고 비판받았다) 더 나아가 독일 물리학계를 지원해보고자 나찌 정권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꾀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시대를 초월한 고고한 천재가 아닌, 독일에 남아 당시 어려웠던 독일 과학계를 위해 힘든 선택을 계속해야만 했던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하이젠베르크 본인은 자기가 나찌 정권의 협조를 적극적으로 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계질량의 계산에서 실수를 범했다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