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소외된 모든 이의 고향

『현대문학』에 연재되던 「태백산맥」을 기다리는 일은 감질났다. 한 달을 기다려 잠시 달콤한 만남이 끝나면 다시 이별이었으니, 견우 직녀가 따로 없었다. 나중에 완간된 뒤에도 대학 도서관에서 『태백산맥』을 빌리기는 정말 어려웠다. 아무리 서둘러도 나보다 빠른 학생들은 늘 넘쳐났고, 허탕을 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니 제3권 빌린 뒤에는 제8권 읽고 다음에는 제2권을 읽는 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학생들의 손길을 거친 책은 철사로 동여매고 온통 ‘반창고’를 붙인 상처투성이였다. 아마도 닷새를 걸어가 책 한 권을 베껴 와야 했던 조선시대 시골 선비가 책을 대하던 마음이 아마 이랬으리라. 그렇게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한국인의 교양필독서였다. 더군다나 대학생에게야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80년대 언저리의 풍경이다. 요즘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한테는 『태백산맥』이란 그야말로 힘겨운 산맥인 듯하다. ‘필독서’라니까 읽기는 해야 하겠는데, 열 권의 부피를 떠올리면 한숨부터 나온다는 식이다. 완독한 학생들은 드디어 열 권을 다 읽어냈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그토록 지극한 기쁨이었던 일이 불과 20년만에 힘겨운 난관이 되어버린 그 아찔한 변화 속도에 현기증이 난다.

이 현기증을 좀 덜어보고자, 새 세대들이 그 부피에 기죽지 않고 『태백산맥』에 도전하도록 돕기 위해, 나는 최 근 두 가지 작업을 했다. 조정래 선생을 모시고 진행한 벌교 기행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 새 세대들이 좋아하는 영상을 통해 접근해보려는 시도였다. 또한 벌교 기행문을 본격화해서 책으로 펴냈다. 알고 보면 더 많이 보이는 법이니까.

이 두 작업을 위해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 들렀던 벌교는 온통 『태백산맥』이었다. 정하섭이 순천에서 벌교로 숨어들던 진트재, 소화가 그를 감춰주었던 현부자네 별장, 빈농들이 개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쌓아올린 중도방죽, 염상구의 아지트였던 청년단, 그리고 아, 율어해방구.

▲ © 이상윤 기자

태백산맥』은 또한 현재진행형이었다. 거기서 한 여인을 만났다. 빨치산 강동식의 아내, 쫄깃쫄깃한 겨울 꼬막맛에 비유되던 여인. 유난히 큰 가슴 때문에 고민하고 봉숭아 꽃과 치자꽃을 좋아하던, 바로 외서댁이다. 외서댁이 살던 회정리 3구에서 친정인 외서까지를 차로 달리다가 어떤 촌아낙을 만났을 때 스쳤던 상념을 나는 책에서 이렇게 정리해보았다.

“창 밖을 보라. 저기 터벅터벅 걷고 있는 아낙네. 외서댁이다. 그네를 떠올리면 오늘 답사에서 다리가 좀 아프더라도 불평은 차마 나오지 않으리라. 우리는 이렇게 차에 앉아 편하게 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 차가 일으키는 흙먼지를 마시면서 외서댁은 저렇게 힘든 삶을 걷고 있지 않은가. 인도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위태로운 길을 위태롭게 걷고 있지 않은가. 우리 효순이, 미선이도 저렇게 인도조차 없는 비인도(非人道)적인 길을 걷다가 참변을 당했겠지.”

그렇다. 외서댁은 벌교의 저 아낙이고 효순이, 미선이다.어디 벌교뿐이랴. 소외 당한 이웃들이 있는 곳은 모두 『태백산맥』이다. 늘 차만 타고 가는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게 마련이지만, 우리의 도로 체계는 저렇게 걷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원래 그들의 것이었던 소담한 흙길을 포장해서는 힘센 타지 관광객들의 차도로 바꿔 버렸다. 그러니 『태백산맥』은 단지 50여 년 전의 일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벌교만의 문제가 아니고 한반도 전체의 일이다.

벌교를 다룬 인터넷 사이트를 열고 벌교 기행문을 냄으로써 내 나름의 『태백산맥』 읽기는 일단락된 셈이다. 20여 년에 걸친 긴 독서였다.

한만수 동국대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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