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일본의 역사왜곡 비판하고
우리 안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도 질문할 수 있어야


최근 일본의 행보가 우리를 걱정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걱정의 진정한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대체적으로 우회적으로 제기되면서 ‘감정적 대응’은 삼가자는 식의 결론을 도출해내거나 민족주의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국가주의에 대한 경고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옳은 이야기이다. ‘감정적 대응’이 아닌 어떤 합리적이고 이성적 대응이 존재한다면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닌 이상 후자가 더 나은 대응 방식이라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또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야합에 대한 경계의식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이미 몸소 체득한 교훈이 아니던가. 그러나 대응의 합리성, 국가주의에 대한 경계만이 사고의 참조점에 그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걱정의 진정한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얻어야만 그와 같은 참조점이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이에 대한 답은 역사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할 것인데, 역사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규정들에도 불구하고 역사 혹은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오늘날의 삶의 조건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부터 생각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어느 나라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역사를 풀이하는데 유독 일본에 대해서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불공정하지 않느냐는 일본의 한 보수언론인의 질문에 대해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은 역사의 진실은 하나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의 답변은 절묘한 답변일 수 있으나 ‘역사의 진실’만이 우리의 관심의 전부는 아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내적 역사에 대해 어떠한 거짓된 정보를 양산해내고 그것을 가르치든 그것은 사실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설령 일왕이 진정 신의 후손이라고 그들이 자신의 후손들에게 가르친다 한들 그것은 그야말로 그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주권’의 문제일 뿐 우리가 걱정과 우려라는 심리적 비용을 치루면서 바라볼 문제는 아니다. 핵심은 그들의 내적 역사와 우리의 내적 역사가 서로 중첩되는 부분이 존재하며 이러한 역사야말로 그들과 우리가 공유하는 역사로서 우리 자신 및 후손들의 삶의 조건과 긴밀히 연관된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후손들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최근 일본의 행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역시 미래의 후손들의 삶의 조건에 유리한 형세를 만들기 위해 이와 같은 행보를 펼치고 있다면 우리의 걱정이나 그들의 행보나 동등한 규범적 무게를 지닌 것에 불과한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아마도 인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유리한’ 조건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이 존중되는 국제적 환경을 원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전개되었다면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국제적 환경’만이 문제되는가? 공유된 역사가 왜곡되는 현상이 일국 내에서는 없단 말인가? 이러한 왜곡이 인권침해에 대한 둔감성을 야기하는 일이 진정 일국 내에서는 없단 말인가? 국가주의가 민족주의를 활용해 회피하고자 하는 질문들이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아닐까?


송성국
법대 박사과정 법철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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