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나는 학교로 향하는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싣고 있었다. 조금 늦은 출근 시간. 대개 그 시간대가 그러하듯 지하철 속은 낮 동안의 소일거리를 찾아 나선 어르신들, 등교하는 대학생들, 그리고 일을 찾아 어디론가 향하고 있을 법한 주부들이 승객의 대다수. 열차가 낙성대역을 막 떠날 즈음, 주변의 옥신각신 소리에 귀가 끌린다. 다음은 고개 돌려 바라본 현장상황.

어떤 어르신 왈, “요즘 젊은 것들은 문제야! 애들 낳아 잘 기르는 게 인생의 낙인데 말이야. 여자 하나가 애 하나 겨우 낳을까 말까, 뭐하는 짓들인지.” 바로 앞에서 손잡이를 잡고 선 30대 중반의 여승객, 딱히 자기에게 한 말이 아닌데도 기분이 틀렸는지 냉큼 대든다. “아니, 할아버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애 하나 키우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데. 애 하나 있는 거 학원 보내랴, 뭐하랴, 이제 초등학생인데 깨지는 돈이 수십만원이에요. 하나 더 낳으면 할아버지가 대줄 것도 아니면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자식 사교육비 마련하려 일거리 찾아 나선 주부인 듯하다. 어르신, 예상치 못한 속사포식 일격에 약간 머쓱해 하시다가, 이내 얼굴을 붉히신다. 뭐라 반격하시려는 찰나, 열차는 서울대입구역에 도착. 흥미진진 엿듣는 재미를 더해주던 두 사람의 대화를 더 지켜볼 수는 없는 일, 열차에서 내려야 했다.

마침 1?? 운동이 누리꾼들의 입방아에 시달리고 있을 즈음, 우연히 목격한 ‘세대갈등’의 현장이었다. ‘결혼후 1년 내 임신, 2명의 자녀를, 30세전에 낳자’는 운동에 대해 젊은 누리꾼들이 제기한 비판의 요체는, ‘이 운동을 따라하면 40대엔 파산’한다는 것이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슬로건이었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 이제 저출산과 고령화의 늪에서, 상황은 180도 반전되었다.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2003년 기준 1.19명에 불과하다. 한 자녀가 대세이고, 얼마 안 가 생산인구규모의 축소로 인한 국가경제의 좌초가 걱정된다. 연금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정책당국이 긴장할 것은 뻔한 일. 문제는 기껏 내놓는 대책이 지나가던 소도 웃을 지경의 캠페인이거나 선별적인 아동수당 몇 푼어치 미봉책뿐인 점.

제발, 핵심을 보자. 왜 젊은 부부가 아이를 갖지 않는가? 아니, 갖지 못하는가? ‘필수’가 되어버린 사교육은 비싸다. ‘조그만’ 아파트 값마저도 천정부지다. 둘이 일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지만, 당장 아이를 맡기고 일하기 난감하다. 친정어머니도 애 둘은 못 보신다고 고개를 젓기 일쑤.

요컨대 제대로 된 생산적인 복지국가가 답이다. 특히 성공적인 복지국가들에서 제공되는 양육·양로서비스, 저렴하되 질 높게 주어지는 주택이나 교육 등의 복지서비스. 이러한 복지국가의 정책들이 생산적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아동의 양육과 교육을 사회가 해준다면, 우수한 여성인력의 노동시장 참여에 숨통이 트이고 아이 하나 더 갖는 부담이 준다. 우수한 여성노동력의 확보는 생산성의 추가확보를 가능케 하고, 더 쉽게 낳아 잘 길러질 아이들은 미래생산력의 근간이 된다. 이러한 정책들의 효과는 이미 북유럽 복지선진국들의 경험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고, 그들이 일구었던 복지국가의 생산적인 측면들은 현시점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적용가능하다. 핵심을 보면, 개인의 책임으로 모든 것을 전가하는 시장지상주의는 더 이상 답이 아니다.



안상훈 사회대 교수,  사회복지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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