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내 짤막한 코멘트에 김군은 “왜 그런 걸 가져야 되느냐”며 나의 설명을 요구했지요? 하긴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메일로 간단히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 글로써 그 답을 대신할까 합니다. 이호철의 「남녘사람 북녁사람」에는 우리의 분단상황이 빚어낸 다양한 인물들이 나옵니다. “나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며 “나는 이들의 시비를 가릴 신념이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셨지요. 고백하건대, 김군의 이 글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은 실은 ‘역사의식의 결여’라기보다는 우선은 나와 김군 사이에 가로놓인 세대간 격차였답니다. 이른바 ‘민주화투쟁 미체험 세대’와 대화를 나누려 하고 있다는 상황 인식이 가로늦게 찾아온 것이지요. 코멘트를 길게 써서라도 어떻게든 잘 설명하려고 노력했어야 마땅했는데도, 역사의식 운운하며 다소 억압적인 코멘트로 간단히 끝내고자 한 것은 나의 잘못입니다. 사과합니다.

하지만, 왜 역사의식 같은 것이 필요하냐고 되물은 김군도 썩 잘한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이것은 역사의식의 중요성을 몰라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김군 세대의 각박한 삶에 있어서 역사의식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 되느냐 하는 점을 되물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에 대한 암묵적 비판도 숨어 있는 것 같고,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그러면 어떤 사회를 만들어 놓았느냐?” 하는 반문도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새 잎새 돋아나고 꽃피고 새 지저귀는 4월의 관악은 정말 아름답습니다.동[]식물들에겐 계절에 적응해서 살아나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다시 시작해야 하니 겨울의 칩거 때보다 더욱 ‘잔인한 달’일 수 있습니다. 엘리엇은 이런 의미에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썼지만, 나의 세대는 독재에 항거하다 흘린 동료들의 피 때문에 4월을 ‘잔인한 달’로 기억하고,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물론, 4[]19 및 6[]3 세대가 초심(初心)을 잃고 자체 분열된 나머지 독재체제를 빨리 종식시키지 못하고 우리 국민에게 5[]18과 6월항쟁까지 겪도록 만든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독재의 물리적 폭압을 물리치고 한국 민주주의를 이제 본 궤도에 올려놓은 것도 사실이며, 그 기반 위에서 오늘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여유도 있다고 봅니다.

젊은 관악인이라고 왜 고통이 없겠습니까? 더 메마른 경쟁사회 속에 내던져져 어떤 점에서는 선배들보다 더 ‘잔인한’ 세월을 살아가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단상황 하의 엄혹한 동토(凍土) 위에서 앞서 산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는 불쌍한, 불행했던 선배들의 입장도 한번쯤 역지사지(易地思之)해 주시고, 부디 보다 더 투철한 역사의식과 함께 자신의 시대를 살아주시기 바랍니다. 올바른 역사의식이야말로 이 땅의 미래 사회에다 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담보해 줄 것이고, 우리 공동체가 보다 더 인간적인 얼굴을 갖도록 우리 역사를 조금씩 진보시켜 줄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새 세대가 처해 있는 역사적 좌표와 사명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에는 최인훈의 「광장」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 나온 작품들 중에는 김원일의 「푸른 혼」을 권하면서,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참, 나의 세대는 잘 못하는 말인데요, 편지 형식이라 편하네요 -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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