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박완서 (소설가)

교과서 외의 읽을거리에 눈뜨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그 전까지 변변한 동화책을 접해본 적이 없었다. 집안이 가난한 때문도 있었지만 시대도 일제 말기라 누구에게나 궁핍한 시절이었다. 5학년 국어교과서, 도서관이란 대목에 도서관에서 책을 열람하는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그걸 배우고 나서 선생님이 도서관에 가본 아이 손 들어보라고 했고 아무도 손드는 아이가 없자 일요일에 한번 가보도록 하라고 했다. 그때 선생님이 일러준 도서관이 그때는 총독부도서관이라 부르는 지금의 국립도서관이었다. 숙제라기보다는 권고사항에 불과한 것을, 답답한 모범생이었던 나는 꼭 해야 하는 숙제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마침 늘 붙어 다니던 단짝도 나처럼 융통성 없는 아이여서, 이 골치 아픈 숙제를 어찌하나 같이 의논하다가 꾀부리지 않고 하는 게 수라는 결론을 내렸다.

선생님이 일러준 총독부도서관은 을지로 입구 지금의 소공동 롯데 호텔 자리에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밖에 모르는 우리에게 머나먼 원정길이었다. 물어물어 도달한 도서관은 붉은 벽돌의 권위적인 건물이었고 정문에는 수위까지 서 있었다. 수위가 우리를 못 들어가게 가로막으면서 아이들이 오는 데가 아니라고 했다. 금줄 두른 모자를 쓴 수위가 무섭기는 했지만 이 세상에 선생님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가 보라고 했는데 왜 못 들어가냐고 대들었다. 수위가 아이들도 들어갈 수 있는 부립(府立)도서관을 일러주었다. 지금으로 치면 시립도서관에 해당할 것이다. 다행히 거기서 멀지 않은, 조선호텔 정문 맞은편이었다. 그 도서관에는 아이들이 자유로 출입할 수 있는 어린이 열람실이 별관에 따로 설치돼 있었다. 교실만한 크기 한쪽 벽이 천정까지 닿는 책장이고, 책장을 등지고 우리 쪽을 향해 선생님처럼 생긴 어른이 한 사람 있을 뿐, 아무런 절차나 허락을 거칠 필요 없이 책을 자유롭게 꺼내볼 수 있는 개가식이었다. 그 열람실을 지키고 있는 어른은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가 아이들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있는 책을 꺼내 주거나 떠드는 아이를 제지할 뿐 아이들에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세상에 그렇게 아름답고 재미있는 책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일요일에만 도서관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이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었다. 『소공자』, 『소공녀』, 『거지왕자』, 『인어공주』, 『철가면』 등 수많은 동화책은 그때 다 읽었다. 책을 밖으로 내갈 수는 없었지만 출입은 자유로워 눈이 피곤하면 동무하고 바람을 쐬러 마당에 나가기도 했다. 열람실 밖엔 포프라 나무가 서 있었고 그 그늘엔 벤치도 놓여있었다. 그 휴식은 얼마나 달콤했던지 멀리 들리는 도시에 소음이 아득했고 우리는 마치 별천지에서 신선놀음을 하는 것 같았다. 동무하고 읽은 책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것도 다음에 읽을 책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우정을 더욱 깊고 어른스럽게 했다.

재미 이상의 고민 같은 것을 하게 만든 책은 『아아, 무정』으로 번역된 『레미제라블』이었다. 수많은 책 중에서 한 권을 고를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삽화였는데 『아아, 무정』도 겉장에 나와 있는 눈을 부릅뜨고 머리를 산발한 무서운 노인에 끌렸다. 나는 그 때 순정동화책을 어느정도 졸업하고 탐정소설에 빠져 있을 때여서 그 책도 탐정소설이려니 했다. 동화책으로는 아주 두꺼운 부피여서 하루에 다 못 읽고 이틀에 나눠 읽었다. 그건 어린 내게 충격적인 독서경험이었다. 반만 읽고 집에 가야할 때 그 책을 훔쳐가고 싶었고 일주일을 기다리는 동안 마치 혼을 도서관에 놓고 온 것처럼 멍하게 지냈다. 다음 주일에 마저 읽고 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 세상이 달라 보였다. 세상이 전처럼 질서있고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었다. 나는 부쩍 어른이 된 것처럼 느꼈고 많은 옛날이야기를 알고 있는 어머니까지도 나보다 정신연령이 낮은 사람처럼 보였다. 건방져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학교 시험이 얼마 안남은 6학년 때였다.

중학교 2학년 때 해방이 됐고, 나는 비로소 책 가난을 면했다. 오빠가 책을 좋아하는 동생을 위해 세계문학전집을 선물해주었다.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가재도구와 함께 책도 시중에 헐값으로 넘칠 때였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읽은 책도 『레미제라블』이었다. 어린이 열람실에서 그 책이 제일 두꺼운 책이었던 것처럼 그 문학전집 중에서도 그 책은 세 권 분량의 가장 긴 책이었다. 며칠 밤을 세며 그 책을 독파하면서 나는 크나큰 혼동에 빠졌다. 자유와 나폴레옹이라는, 외견상 상반되는 것을 신봉하는 빠리의 뒷골목의 노한 군중, 7월 혁명, 6월 폭동 속을 걸어가는 비천하고도 위대한 사나이, 비명 없는 죽음, 거기서 허우적거릴 때 나는 비로소 사춘기였고 우리나라는 해방 후의 혼란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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