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 가장 먼 곳에 남아있는 집은 초등학교 이학년 때까지 살았던 홍제동의 한옥이다. 삼년 남짓 살았으니 그리 긴 기간이 아니지만 이 집에 대한 기억만큼은 가장 선명하다. 겨울아침 안마당에 소복이 쌓인 백설의 눈부심이나 장독대를 세차게 때리는 장대비의 소리도 그립지만, 새봄을 맞아 온 집의 문짝을 떼어내 겨우내 쌓인 먼지를 털고 물걸레질을 하던 대청소의 소란함은 더욱 아련하다. 지난 가을 책갈피 속에 곱게 말린 단풍잎을 창호지 사이에 넣기도 하고, 창호지를 여러 번 겹쳐 접은 다음 모서리를 가위질하여 만든 마름모꼴의 연속무늬를 유리창에 덧붙이기도 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상경한 일가들은 대개 결혼을 해서야 집을 떠나니 한옥은 언제나 만원이었고, 그러기에 대청소의 날에는 한 솥 가득 국수를 삶아도 모자라기 일쑤였다.

윗동네의 문화주택으로 이사한 것은 그 해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겨울이어서인지 집안은 어두컴컴하였고 집은 더 넓어졌는데 방의 수는 오히려 줄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방들이 연속된 긴 복도가 있고 그 끝에 마루와 안방이 여닫이문으로 구분돼 있었다. 주거사를 연구한다고 하면서 이 집이 미국식 주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고 오랫동안 우리는 이것을 일본 집으로 알고 있었다. 어른들은 무엇보다 마당이 넓어진 것을 좋아하였다. 뒷마당엔 조그만 텃밭을 꾸몄고 앞마당엔 겨우내 갈무리해 둔 꽃씨를 모아 화단을 만들었다. 동요 가사처럼 채송화도 봉선화도 곱게 피고, 파란 나팔꽃이 어울리게 핀 것도 물론이다.

겨우 2년을 빨간 벽돌집에 살다가 아버지는 그 자리에 새로 ‘미니이층’의 양옥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집 전체를 지면에서 일미터 남짓 들어 올리고 그 아래 지하실을 두었는데, 이는 서울의 공비침투사건 이후 새로 생긴 방공호 설치규정 때문이었다. 다시 마루가 집 가운데로 왔고 각 방들은 마루의 양 옆과 뒤에 붙어 있었다. 계통으로만 본다면 한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인데 처음으로 우리는 이 집을 양옥이라고 불렀다. 아직 부엌에는 부뚜막이 있었지만 수세식의 변소가 집안으로 들어오고 라디에이터가 놓이면서 마루는 거실이 되었다. 당시 유행하던 노래가 ‘저 푸른 초원위엷로 시작하는 남진의 노래였다.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평생 살고 싶다’는 1970년대의 꿈은,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겠다는 민요의 시대와 이렇게 결별하였다.

이후 대학에 진학하면서 신림동의 슬라브집으로 옮기고, 결혼을 하면서 비로소 작은 서민 아파트에 둥지를 튼 것은 윤수일의 「아파트」가 나오고도 근 십년이나 지난 1980년대 말이다. 하지만 30대의 생활은 직장과 육아의 핑계로 더욱 이동이 잦아 유목민과 같이 이삼년을 주기로 다섯 번의 이사를 더하게되니 그간 살아본 집만도 열 채가 넘는다. 신기한 것은 아파트 이전의 집들은 모두 제각기 이름을 가진 독특한 주택형식을 담고 있지만, 아파트는 단지 위치와 규모만으로 호칭된다는 점이다. 자연히 집에 대한 기억도 공간이나 형태가 아닌 주소를 매개로 하게 된다. 집에 대한 노래도 더이상 나오지 않고 겨우 디제이덕의 리메이크만 나올 뿐이니,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가 가족과 공동체가 함께하는 우리의 집으로 바뀔 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집에 이름부터 붙이고 볼 일이다.


전봉희

공대 교수․건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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