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 (誰も知らない: Nobody Knows, 2004)

김창훈(독어교육과ㆍ03)

아이들이 있다.

어른들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그들을 구별할 수없다.

「아무도 모른다」의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줄곧 사라져 가는 존재들과 그 흔적을 테마로 삼아 왔다. 이번 작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여기서 사라져 가는 것들이란 어떤 실체로서의 존재만은 아니다. 우리가 보지 않았던, 혹은 보지 못했던 여러 경계와 관계에 대한 것들, 어쩌면 그것이 핵심으로서 우리 앞에 던져진다.

영화의 첫머리, 출생신고도 되지 않았던 아이들이 그들의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존재)와 함께 새 집을 찾는다. 세 어린 동생들은 가방에 담겨진 채 그들의 존재마저 알리지 않음을 약속하고 다만 첫째만이 외부와의 접촉을 허락받는다. 이후 카메라는 거의 집 안에만 머물며 이들 4남매가 그들의 시간을 어떻게 빼앗겨 가는지 조용히 담아낸다.

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웃음이 많고 행복해 보인다. 현실이 드리운 그림자로부터 무감각하게 등을 돌려버린 어머니의 옆에서, 첫째 아키라는 그 모든 어둠을 짊어지게 된다. 어느 날부터 귀가시간이 점점 늦어지던 어머니는 아예 집을 수일씩 비우기도 한다. 그리고 약간의 돈을 남긴 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둘째 교코가 아키라에게 어머니가 언제 돌아오는지 물었을 때 아키라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어머니가 왜 자신들을 버렸는지, 새로이 누구를 만난 것인지, 아키라 역시 알지 못한다. 다만 어머니가 자신들의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1988년 일어났던 실제 사건과는 조금 다르지만, 4남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영화는 현명하게도 감상이나 분노에 젖어 시야를 흐리게 하지 않는다. 당시 사건 이후 주를 이루었던 의견들-무책임한 어머니를 질책한다거나 이들을 6개월이나 방치해 두었던 사회에 책임을 돌리는 식의 단순한 해석-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이 영화 속에서 어른과 아이의 경계는 거의 무의미하다. 어머니는 철이 없다 못해 가려진 큰 슬픔이라도 있지 않을까 돌아보게 만들 정도이고 각기 다른 네 아이의 아버지들은 하나같이 책임감이 결여된 미숙아들이다. 동네 사람들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제거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만큼 얄팍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물론 그 과정은 너무도 아프고 얼음처럼 시리다. 이들이 자신의 삶을 조금씩 소진해 나가는 결말까지의 과정은 그 평온하고 일상적인 묘사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게 심장을 찌른다.

아이와 어른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는 사키라는 외톨이 소녀가 자리잡고 있다. 우연히 4남매의 친구가 된 이 소녀는 어떤 남자와 가라오케에 같이 가 준 대가로 돈을 받는다. 아키라는 처음에는 그 돈을 뿌리치지만 결국에는 막내 유키를 위해 받아들이게 된다. 이들은 어른이 되기에는 너무 이르고, 아이로 남기에는 어느새 너무 성숙해 버렸다.

4남매의 어머니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녀에겐 어떤 과거가 있었을까. 아이들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 어떻게 사람들은 이토록 무심하게 이들을 방치할 수 있었을까. 모든 질문들을 한 아이의 싸늘한 손과 함께 묻어둔 채 감독은 너무도 화창한 여름 하늘 아래 시간을 정지시킨다. 답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보다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가 알겠는가.

다만 정지된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사라진 것들의 흔적을 간신히 메워나갔던, 이제는 아이가 아닌 이들의 슬픔을 본다. 후반부에 나오는 노래가사처럼, 이들은 ‘아무도 다가가려 하지 않는,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보석’이 되었다. 그렇게 성장하고 그렇게 살아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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