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다

김형준(영어영문학과ㆍ01)

나는 흔히 말하는 ‘길캄다. 전에 살던 동네에서도 몇 개월을 탐색하고 나서야 머리속으로 그 동네의 지도를 대충이나마 그릴 수 있었다. 더 자세한 골목길은 그러나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내가 이 동네에 온 지는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을 가로지르는 4차선 이상의 도로만을 겨우 가늠할 수 있었을 뿐, 집으로 가는 길조차 동네를 두세 바퀴 정도 돌지 않고서는 찾아내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도중 졸았던 나는 몇 정거장인가 뒤에 내리고 말았다. 허겁지겁 내려 위치를 파악하려던 나는 그러나, 전혀 낯선 길들과 건물들 속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치를 물어보려 근처 편의점에 간 나를 한 여자가 계속 쳐다보더니 내게 다가왔다. “이 동네가 처음이신가요?” “예. 그런데 어떻게 알았죠?” “전 길 잃은 사람을 잘 알아본답니다. 게다가 그쪽이 초면도 아닌걸요.” “예?” “저는 당신이 어디 사는지도 알고 있답니다. 절 따라오면 님의 집까지 금방 갈 수 있어요.” 헤매는 것보다 비록 초면이지만 길을 알고 있는 여자를 따라가는 편이 낫겠다,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초면이 아닌데다, 내 집을 알고 있다지 않는가!

그녀는 큰 대로를 세네 블럭인가 지나더니 자동차가 두어 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로 나를 안내했다. 우리가 가는 길의 곳곳에 늘어선 가게들을 보며 그녀는 자신이 고등학교 다닐 때 이 가게에서 자주 떡볶이를 사먹었다는 따위의 시시콜콜한 얘기서부터 조금 더 들어간 곳에 있는 팬시점에서는 남자친구를 위해 열심히 편지지를 골랐다는, 나한테는 별 소용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얘기를 계속 해댔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녀는 편지지에 버버리 향수를 뿌려서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보냈다 했다. 그 향수는 나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집으로 온, 송신인이 쓰여있지 않은 편지들의 냄새의 정체를 누나에게 물어보니 버버리 향수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이제 폭이 5m도 채 되지 않을, 다세대 주택이 주욱 늘어선 골목으로 날 인도했다.  “이 골목은 어쩐지 친숙한 느낌이 드는군요.”, 말했다. “그래요. 그렇지 않으면 이상하죠. 당신은 이곳을 잘 알아야만 해요.” 약간 기울어진 전봇대들 사이를 축 늘어진 전선이 있던 곳. 중학생 때 난 이같은 골목에서 한 친구와 키스를 한 적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 아니,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수록 아이들과 사방치기를 하던 공터와 그 아래에서 몰래 오줌을 누던 나무가 의식 속에서 뚜렷해져 왔다. 그리고 그 옆에 항상 누군가가 함께 있었던 느낌이 함께.

마침내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붉고 아담한 집 앞에 서더니 돌아서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종을 치듯 내 뇌 속을 때리고 갔다.

”자, 여기가 당신의 집이에요. 당신은 이 집을 떠나 혼자 살려고 했지만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당신은 애써 지난 모든 날들을 부정하려 했지. 그래, 우리가 헤어진 뒤로 난 결국 당신이 헤매게 될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어렸을 때 서로 몸을 더듬고 중학생 때 짧게 입술을 스치던, 고교생 땐 향기로만 아스라이 남아있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지는 마. 과거가 없는 현재란 없어. 그리고 넌 너 혼자만의 네가 아니야. 자, 바로 이곳, 내 집에는 널 가둘 수 있는 방이 있어. 내가 널 추억하는 한 넌 언제나 내 맘 속에 갇힌거야. 이제 알겠어? 내 사랑, 내 안의 너…”

집의 문이 열리고, 이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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