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인문대 교수ㆍ영어영문학과)

“운동보다 운동가요를 더 좋아했다”는 듣기에 따라서는 몹시 민망한 시구도 있지만, 학부 시절 나야말로 세미나보다 뒷풀이를 더 좋아했다. 자신에게 맡겨진 발제를 성실하게 하고 뭔가를 배웠다 싶으면 책임은 다한 것이었고,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선후배 동기들과 나누는 토론에서 책 못지않게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다. 사실은 공부와 술자리가 아예 한 장소인 경우가 잦았는데, 학교 주변의 허름한 중국집 방들이 그런 모임들로 북적거렸다. 교내에는 세미나 장소도 마땅치 않았고 공부모임 자체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학교 밖으로 돌았던 것이다. 

내가 학부를 다닌 1970년대 후반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말기였고, 우리는 긴급조치 9호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긴급조치를 비판하는 것은 물론 그런 비판에 관해 보도하는 것도 처벌 대상이었던 기막힌 법이 나라를 쥐고 흔들던 시절이라 나는 긴급조치 9호라는 게 있다는 사실조차 1학년 말이 되어서야 알았다. 꿈에 부풀어 입학한 학교가 실망스러워 방황하던 중에 늦가을에 터진 학내 시위로 무려 20여 일간 휴교령이 내려지는가 하면 뒤이어 벌어진 시위로 동기들이 여럿 제적되고 구속되었던 사태는 큰 충격이었다.

바로 이런 충격이 나로 하여금 정규과정의 학업이 아닌 세미나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당시 학생들의 세미나 모임이라면 단과대학의 학회들과 편집실, 특정 단과대학 소속이 아니고 학생회관에 자리잡고 있던 써클들이 있었다. 학회는 거의 운동권 조직이었지만 써클들은 성격이 다양했는데, 내 경우는 개인적으로나 활동한 모임의 성격으로나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반유신, 반독재투쟁의 분위기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틀림없다.       
 
물정모르는 신입생으로 하여금 사회현실에 눈뜨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1960, 70년대의 우리 문학작품이었다. 김수영, 신동엽, 김지하, 신경림, 김남주 등의 시와 이문구, 조세희, 황석영 등의 소설은 현실을 향해 열린 창구였다. 이들의 작품이 주로 발표되던 계간지를 탐독하는 일이 대학생다운 대학생의 지표이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꼭 세미나가 아니더라도 문학토론은 어디서나 접할 수 있던 풍경이었다.

국내서로는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한 책들이 단연 필독서였고 송건호, 한완상의 사회평론집들도 많이 읽혔는데, 상당수가 판매금지도서였고 필자들도 해직기자, 해직교수인 경우가 많았다. “엽전들은 안돼!”라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식민지사관이 남긴 정신적 상흔이 일상생활에서도 역력하던 당시로서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성과들은 한 학기로도 모자라는 공부 대상이었다. 서양역사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의 발생에 관한 논쟁을 포함하여 경제사 관련 서적들을 많이 읽었고, 당시 새로 소개되어 관심이 커지던 종속이론의 대표격이었던 A. G. 프랑크도 인상적이었다.

좌파적 성향의 문헌이 엄격히 통제되던 시절이라 관련 서적은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이 중에서 지금도 내 사고력과 영어독해력을 함께 길러준 책이라고 믿는 것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인 H.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남미의 사회운동가인 P. 프레이리의 『피억압자들의 교육학』이 기억난다. 지성인이라면 동ㆍ서양고전을 다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서삼경도 들여다보고 플라톤의 대화편도 열심히 읽었으며, 헤겔의 『역사철학강의』나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철학도 손에 닿는 대로 세미나의 대상이었다.

돌이켜 보면 고전을 읽는답시고 엉뚱한 얘기들도 많이 했고, 방향을 잡지 못해 모임이 표류하는 일도 잦았다. 그러나 전공분야인 영문학 외에 역사, 철학, 사회과학에 이르는 다양한 독서는 오늘의 나를 키워준 자양분이었다. 내가 은사로부터 듣던 말씀이지만, 공부에는 선생에게 배우는 것, 동학들과 함께 하는 것, 혼자 하는 것의 세 가지가 있다. 이 셋 중 어느 하나도 빼먹을 수 없는 공부법이다. 과거보다 한층 더 사회진출의 중압감에 시달리며 훨씬 개인화된 오늘의 학생들이 어떤 형태로든 동학과 함께 하는 공부의 소중함을 꼭 체험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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