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숭희 사범대 교수[] 교육학과

올해 정시 논술시험 문제에는 개구리 네 마리가 등장했다. ‘개구리의 의식화 과정’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이 이야기는 사실 필리핀의 PEPE(Peple’s Empowerment Popular Education)라는 민중교육단체의 핸드북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필자는 평소 수업에서 자주 이 개구리들의 이야기를 화두로 꺼내곤 했다. 과연 어떻게 이 우물안 개구리들이 세계 운동의 법칙을 이해하게 되는가를 그려낸 이 이야기는 민중의 시각에서 학습의 숨겨진 진실들을 잘 암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교육사에서 ‘선택된 자’의 교육과 ‘배제된 자’의 교육은 극도로 차별적이었다. 학교로부터 탈락하는 그 순간부터 제2의 교육기회를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들은 평생을 숨어서 공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반면, 우리가 스웨덴의 정치모델과 복지모델을 찬미할 때 그 이면에는 ‘교육의 동지애’가 숨어있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사람은 적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성인이 되더라도 필요한 교육의 기회를 이중 삼중으로 보장하는 국가 전체의 동지애 말이다.

공교육에서 외면 당하는 사람들
‘교육의 동지애’가지고 둘러봐야


대한민국 교육이 온통 일류대학, 입시전쟁, 고액과외에 관심을 쏟고, 신문들은 연일 하버드와 예일에 동시에 입학한 학생의 프로필로 교육사건기사들을 채워나가고 있지만, 우리의 현대사 속에는 그 빛의 그늘에서 조용히 세상의 파편들을 읽어내기 위해 힘써 학습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지만 우리는 그것을 ‘민중교육’이라고 불렀다.

1970년 전태일 열사 이후 끊임없이 이어져온 노동의식의 역사는 숨겨진 노동학습의 역사였다. 대학생과 노동자의 만남이 학습이라는 고리를 통해 이루어졌고 숨어서 공부하는 야학운동이 노동운동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었다. 빈민운동의 대부였던 허병섭 목사가 당시 지식인중심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스스로 말하게 하라』라는 책은 권력을 가진 교육자 중심의 교육현장으로부터 민중학습의 틈새를 읽어내는데 의미있는 초석이 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지식인층이 진보담론을 공부하기 위해 선풍기도 없는 건물 지하 강의실을 빼곡이 메웠던 시절이 있었다. 인천 노동자 대학 학생들이 공안의 눈을 피해 몰래 대학 강의실을 전전했던 경험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그렇게 이루어졌고, 시민사회는 그렇게 건설되었다.

이제 아무도 민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덩달아 아무도 민중의 학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신군부시절 서울대에 입학하면서 ‘자랑스런 서울대 뱃지’를 던져버리고 민중과 함께 학습하려고 했던 서울대 동문들의 전통은 차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난곡 판자촌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더 이상 공순이 공돌이를 찾아볼 수 없어서인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아직도 대한민국의 공교육이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50대 이상 여성인구의 학력평균이 5.5년, 즉 초등학교 의무교육조차 받지 못했다면 이것은 엄연히 국가의 직무유기이며 헌법 소원감이다. 하지만 문제삼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세월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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