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라크
미국과 이라크
  • 김용구 명예교수
  • 승인 2003.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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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군단을 격파한 한니발 장군은 고국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로마를 타파했으니 나에게 군대를 더 보내주시오. 이탈리아에게 세금을 물게 했으니 내게 돈을 더 보내주시오."

이라크의 미군 사령관들은 지금 병력과 예산을 더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라크 사태는 한니발 장군이 말한 정복의 속성 자체에 그치지 않고 향후 20∼30년 동안의 국제정치 향방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징후는 9·11 테러에 대한 미국적인 대응이 낳은 결과다. 그 대처 방식의 몇 가지 특징을 보자.

○이라크 사태는 탈냉전 시대의 새로운 폭력 양식인 테러를 군사 문제로만 간주해 군사적인 방법으로 대처한 신보수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신보수주의자들은 파괴는 창조이고 정복은 승리라고 믿는다.


○이라크 침공은 유엔을 무력화하면서 시작되었다. 현 국제사회에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은 유엔의 결의뿐이다.

'애원자'가 되어 버린 초강대국 미국
유럽ㆍ슬라브 문명권과의 대립만 남긴 채 원점으로 돌아와

○이라크 정복은 유럽 열강을 무시하면서 감행되었다. '프랑스를 징벌하고 독일을 무시하고 러시아를 용서하라'고 말하고 '치즈(프랑스)나 초콜렛(독일)을 만드는 나라'로 비하하였다. 이는 세계교회주의적인 미국 사고방식의 발로다.

○정복이 장기화하자 테러의 정치적인 측면이 부각되었다. 신보수주의자들의 예측은 빗나가기 시작했다. 미국 행정부는 결국 870억 달러를 의회에 요청하였고 의회의 승인을 이미 받은 790억 달러를 합치면 1660억 달러에 이른다.

○이라크 정복에 열광적이었던 미국 국민들은 세금을 얼마나 더 내야 할지 모르게 되자 이라크 문제에 회의를 품게 된다. 지금까지 군사비용만 최소 450억 달러를 지출했고 향후 5년의 점령 비용은 30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이라크의 석유 수출로 정복 비용을 충당한다는 계획도 허망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석유 시설은 황폐화되어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투자가 필요하다. 금년에는 석유 수출 이익은 기대할 수 없고 내년에는 120억 달러 정도 그리고 2005년에 이르러야 매년 200억 달러의 수입이 예상된다. 이라크 정부 재산의 해외 매각도 여의치 않다. 계속된 테러로 어느 국가도 매입할 의사가 없다. 정복자가 피정복 지역의 국유 재산을 매각할 수는 있는가?

○결국 미국은 원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유엔에 호소하고 유럽 국가들의 협력을 요청하게 되었다. "초강대국이 애원자가 되어 버렸다"고 국제여론은 야유하고 있다. 프랑스는 이라크에 주권을 즉시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해 지금 미국과 '전쟁' 중이다.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국과 협력해 온 독일도 유엔의 일차적인 책임을 제창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단순하게 원점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유럽과 이슬람 두 세계관의 충돌, 유럽과 미국 사이의 대립, 그리고 유럽의 역사적 멸시를 재현하지 않으려는 슬라브 문명권의 반항을 유산으로 남겼다. 세계 정치의 주변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냉전 시대에는 그래도 단순한 논리가 통용되었다. 이제 복잡하게 등장한 국제정치 구조에 대응하려면 높은 대외 인식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과연 그런 수준에 있는가?

김용구 명예교수
사회대ㆍ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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