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항일 유적 탐방기

『대학신문』은 지난 7월 30일부터 5박 6일 동안 국가보훈처와 문화일보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 기념 대학생 기자단 중국항일유적 탐방(중국항일유적탐방)’에 참가했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일제 치하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순국선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기 위한 의도로 기획된 이번 중국항일유적탐방은 중국 상하이와 동북3성 항일운동 사적지 등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우리들의 기억에서 흐려진 순국선열의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겨 보자는 취지로 중국항일유적지인 윤봉길 의사 의거지, 상해임시정부청사, 백두산, 명동교회, 청산리전적지 등을 탐방하고 왔다.

첫 탐방은 윤봉길 의사가 천장절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릴 때 폭탄 의거를 한 홍구공원이었다. 의거 장소 바로 옆에 윤 의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로부터 500m 떨어진 곳에 윤 의사의 호인 매헌(梅軒)을 따 이름을 지은 매정(梅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매정 2층 안을 둘러보다 흑색판 위에 쓰여진 하얀 글귀에 시선이 멈춰 버렸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더 한층 강의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윤의사가 중국에서 고국에 계신 어머니께 보낸 편지구절이다. 23세의 젊은 나이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윤의사의 독립운동가다운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이튿날 우리 민족의 성산이자 일제 강점기에 항일 무장사를 안고 있는 역사의 산인 백두산을 등반했다. 백두산은 성산이라 불릴 만큼 천지를 비롯한 특이한 절경이 많았다. 백두산 일대는 구한 말 이래 항일 전적지로서 독립군의 피와 눈물이 서려있는 유서 깊은 땅이다. 이곳에서 구한 말 홍범도의 의병대를 시작으로 1945년 해방까지 숱한 항일 운동가들이 일제 침략과 맞서 싸웠다.

윤동주 기념관이 있는 대성중학교, 일송정, 윤동주 생가, 명동교회 등 항일 유적지가 밀집해 있는 용정과 명동도 방문했다. 동쪽을 밝힌다는 뜻의 명동촌은 함경북도 종성에 살던 김약연, 김하규, 문병구, 남종규가 1899년 자신들의 일가친척 142명을 이끌고 이주해 둥지를 튼 곳이다.

김약연은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1901년에 규암재라는 서당을 설립했다. 규암재는 이후 명동학교로 발전해 명동촌 교육의 효시가 됐으며 명동중학교, 명동여학교를 잇따라 설립했다. 명동학교는 1925년 중학부가 폐쇄될 때까지 시인 윤동주, 문익환 목사, 영화 아리랑의 감독ㆍ주연을 한 나운규 등 1000명의 학생을 배출했다. 특히 명동학교 출신들은 용정의 3ㆍ13 만세시위운동, 봉오동ㆍ청산리전투 등을 이끈 주역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명동촌은 단순한 부락이 아닌 민족교육의 산실이자 독립군 양성소였다.

명동촌의 창시자 김약연은 눈을 감으면서 “나의 일생이 나의 유언이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일생은 일제치하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바친 인생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비단 김약연 뿐만 아니라 다른 순국선열들에게 무관심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라의 독립을 열망했던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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