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6월 22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기억 속에는 고운 머릿결을 휘날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던 한 명의 축구선수가 있다. 등번호 20번으로 익숙한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지난 15년 동안 대표팀을 책임지던 그의 축구인생은 1980년부터 시작된다.

1969년 서울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홍명보는 광장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공부 좀 하는’ 아이로 인식되던 그였기에 부모님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홍명보가 운동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광장초등학교 코치의 설득으로 그는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결국 축구부가 있는 광희중학교로 진학했다.

중학생 선수 시절, 홍명보는 ‘공 좀 차는’ 아이라는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키가 작아 다른 선수들에 밀려 주전으로 뛰지 못한 적이 많았다. 경기 도중 어깨뼈가 부러지기도 하는 등 부상을 입는 바람에 그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동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홍명보는 키가 작다는 이유로 다른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신체적인 열세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고, ‘축구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2학년 때부터 키가 자라면서 신체적인 고민은 해결됐다.

홍명보가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맡았던 포지션은 미드필더. 그러나 고려대 3학년이던 1989년, 고려대팀의 수비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수비수로 역할을 변경했고, 얼마 후 태극마크를 달 수 있었다. 수비수였음에도 과거 미드필더 경험이 많았던 터라 ‘골 넣는 수비수’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홍명보는 드래프트 제도(팀이 선수를 지목하면 선수는 그에 따라야 하는 제도)를 거부하고 상무에 입단해 군복무를 마쳤다. 이후 포항아톰즈(현 포항스틸러스)에 입단한 홍명보는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2골 1도움을 기록해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팀의 4강 진출을 이끌어 한일 월드컵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운동선수도 학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는 2002년 홍명보 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또 환경공익기금 환경재단 홍보대사, FIFA 반인종차별 대사, 중앙선관위 홍보대사 등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스포츠스타 홍명보’가 아닌 ‘사회인 홍명보’의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 홍명보는 자신의 꿈을 잠시 미뤄두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대표팀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명예가 무너져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임하는 그가 한국 대표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든든함이 느껴지는 것은 비단 기자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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