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질 들뢰즈 타계 10주년 김재인(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잠에서 깨어 새로운 하루가 오리라는 것을 알 수 없는데도 우리는 오늘을 살아간다. 이런 부류의 믿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것이 아닐까? 삶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 신비는 온갖 부류의 실험가에게서 잘 드러난다. 실험이라는 것은 항상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다. 실험가는 이 위험에도 불구하고 실험을 행한다. 실험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다음을 확신하지 못하면서, 거듭.

들뢰즈가 말하는 실천은 바로 이 실험이다. 안전판이 다 마련되어 있어 그 안에서 쇼하듯 행하는 가짜 실험이 아닌, 제대로 된 바닥조차 없는 곳에서 자기 스스로가 바닥이 되어가며 행하는 실험. 실천의 정확한 의미는, 일단 실천이 있고 나서야 뭔가 생겨난다는 데 있다. 존재보다 실천이 앞선다.

관념론에서 실천은 관념의 확인에 불과했다. 들뢰즈가 가장 경계했던 것이 바로 관념 속에서의 실천이다. 그런 건 누군들 못하겠는가. 허나 삶은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닌 것을. 안전한 도주로가 미리 마련되어 있다면 이미 도주가 아니라 관광이리라. 도주란 아무도 예측치 못했던 길을 뚫어가는 실천이다. 도주가 창조인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철학도 개념의 논리, 개념의 놀이에 불과할진대 그 자체가 관념이 아닌가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응답의 필요 때문인지 철학은 실천의 도구라고 주장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분법적으로 이해된 철학과 실천의 분리는 모두 뿌리 깊은 오류다. 실은 실천은 실험이며, 그렇기에 철학을 포함한다. 문학 실천, 과학 실천, 예술 실천, 철학 실천 등 정치나 경제처럼 상식의 규모로 눈에 보이는 실천 말고도 여러 부류의 실험과 실천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철학은 가치와 의미를 다루는 실천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가령 인간은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 또는 정당성을 묻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뻔뻔한 동물이 아니다. 바로 이런 평가와 해석 작업을 수행하는 절차가 개념이다. 개념은 무색무취의 도구가 아니다. 개념은 그 자체가 평가와 해석이다. 개념을 통해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고 보면, 개념을 어떻게 만들고 개정하느냐의 문제는 인간 삶의 핵에 닿아 있다.

가령 광기의 문제를 보자. 미쳤다는 것은 특정한 평가를 수반한다. 그런데 이 평가가 시대마다 사회마다 다르다. 즉 미친놈에서 미친 분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것이며, 감금에서 권력 부여까지 다양한 실천이 연관되어 있다. 바로 이 평가를 다시 평가하는 작업이 철학의 본령인 것이다.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은 개념들의 보석상자로, 무엇보다 정신분석이라는 평가 방식을 비판하면서 다양체 생성이라는 대안을 마련한다. 시간과 이해관계와 자본의 투자 뒤에는 욕망과 무의식의 투자가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욕망과 무의식은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다. 현실에서는 생산의 사행(事行) 자체가 욕망이고 무의식이다. 정신분석은 현실의 생산을 정신의 영역, 즉 인간과 영혼이라는 테두리에 가두며, 그럼으로써 정신분석은 현실의 생산을 가로막으며 실천을 방해한다. 정신분석은 현실 그 자체를 대가로 치르면서 잘못된 현실의 이미지를 투영하는 것이다.

나아가 정신분석은 현대판 사제 권력을 행사한다. 스피노자의 고전적 물음, 즉 사람들은 왜 예속의 길을 자발적으로 욕망하는가라는 물음은, 20세기에 만연한 파시즘 속에서 그 답변을 절박하게 요구했고,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패스워드로 제시한 것이다. ‘나’를 중심에 놓는 사유는 현실의 인식과 실천을 필연적으로 그릇되게 인도한다. 현실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이런 문제 상황에 대한 비판의 실천이라면, 『천 개의 고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간 대안의 창조이다.

분열증은 생산의 사행으로서의 현실 그 자체이다. 현실과의 풍부한 접촉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다. 오이디푸스는 욕망과 무의식을 ‘나’를 중심으로 ‘엄마’와 ‘아빠’가 펼쳐가는 가족극장으로 만든다. 이에 반해 밀러, 아르토, 로렌스 등 여러 분열적 작가가 말했듯 중요한 것은 ‘나’가 아니라 흐름이다. 그 흐름이 생산이 인위적으로 정지될 때, 병원에서 목격되는 그런 분열증 환자가 나온다. 흐름을 개방하라, 이는 곧 실험하고 생산하라는 의미이다.

분열은 새로운 틈을 만들어내는 실천이며, 그 자체로는 긍정의 운동이다. 분열증을 질병으로 평가하는 것, 그것이 우리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것은 질병이기 이전에 모든 것을 코드에서 해방시킨 자본주의의 운동 자체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삼키지만 다시 토해낸다. 이 변태의 과정 때문에 ‘자본주의의 바깥’을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며, 역설적으로 ‘미침’만이 자본주의의 극한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 미침은 현실과의 접촉이라는 순수한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푸코, 데리다 등과 함께 후기구조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인 들뢰즈는 ‘전후 프랑스 철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중 한사람으로 꼽힌다.
파리에서 출생, 소르본느 대학에서 페르디낭 알키에, 조르쥬 깡길렘 등에게 철학을 배웠으며, 1969년 주 논문 「차이와 반복」, 부 논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70년부터 1987년까지 파리 제8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95년 11월 4일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주요저서로는 『칸트와 비판철학』, 『베르그송주의』,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 그리고  정치 운동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펠릭스 가타리와 공동 집필한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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