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 한국 의료 문화의 딜레마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 한국 의료 문화의 딜레마
  • 허대석 교수
  • 승인 2003.10.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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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본인에겐 알리지 말아 주세요.”

말기 암 환자의 가족들 대부분이 하는 말이다. 환자가 자신의 질병이 치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받을 충격으로 투병 의지를 상실할 것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과연 환자도 이러한 가족의 태도를 자신에 대한 적절한 배려로 감사하게 생각할 것인가?

 

수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현재도 의사가 폐렴환자에게 페니실린을 사용할 것인지 맹장염(충수돌기염) 환자에게 수술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폐렴환자에게 항생제를 사용해서 기대되는 이득이 약에 대한 과민반응으로 손해를 볼 확률보다 현저히 크기 때문이다. 그것을 수치화한다면 99.99%:0.01% 정도이다. 이 같은 상황은 맹장염 수술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학적 결정은 의사가 알아서 결정해 왔다.



그러나 최근 의학의 발전으로 개발된 신약들과 생명 연장을 위한 의료 기기들의 경우 페니실린을 사용할 때나 맹장염을 수술할 때와 상황이 전혀 다르다. 한 예로 새로운 폐암치료제로 세계적 관심을 끌었던 ‘이레사’라는 항암제의 경우 완치가 아닌 일시적인 호전을 목적으로 처방되는 약이며, 그 효과를 볼 확률은 15% 정도이다. 그런데 비용은 한 달에 수백만원이 드는 수준이다. 이 약을 환자에게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완치될 가능성이 없다면 시행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이 같은 문제는 의료현장에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로 환자의 경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도구가 없다는 점에서 쉬운 결정이 아니다. 치료 후 효과가 있는 15%에 속하면 다행이나, 효과가 없는 85%에 속할 경우 부작용으로 추가적인 고통을 받을 우려가 있어서 의사들도 이 같은 치료의 의미에 대해 의견을 달리 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에게 치료 결정권을 주지 않는 문화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환자의 권리를 빼앗아

같은 상황에 있는 환자의 보호자에게 완치가 아닌 생명 연장만을 위해 신약과의료기기를 사용할지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그것이 담당 의사의 의견과 일치할 확률은 1/3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보호자들 간에도 의견이 나뉜다. 그러다보니 치료 결정과정에 의견충돌이 빈번하고 때로는 의료사고로 비화된다. 신약과 신기술을 사용하는 의료 행위 중 상당수는 이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경우 의학적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독단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로 기착한다. 결국 환자 본인의 가치관에 따른 판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환자에게 병의 상태를 정확히 알리는 것을 꺼리고 있어서 대부분의 치료 결정이 의사와 보호자 사이에 이뤄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 결과 환자의 남은 삶을 본인의 입장에서 ‘의미 있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는 기회는 박탈된다. 보호자나 의료인의 입장에서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환자의 입장에서는 ‘고통 받는 기간’만 연장시킬 뿐 의미 없는 치료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나서서 이를 중단시키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딜레마의 원인은 진료와 관련된 의사 결정에 ‘자율성 존중(respect for autonomy)’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의료현장의 치료 결정에는 보호자나 의사가 대신할 수 없는, 환자 본인의 생명에 대한 가치관이 반영되어야 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중환자에게 환자의 병의 상태를 정확히 알리지 않고 환자 본인의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문화 때문에 환자 본인이 치료를 결정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윤리적 혼란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환자 본인이 병의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발적 의사로 진료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허대석 교수

의대ㆍ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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