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세계학계동향 2 철학 : 양선이 박사 (영국 더햄대·철학과 박사후 연수과정)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영국 철학에 큰 변화가 있다면 대륙 철학의 수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이후부터 훗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이 활발하게 연구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프랑스 형이상학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영국 철학의 최신 동향을 소개하면서 이와 같은 움직임이 왜 생기게 되었는가에 대한 진단을 통해 영국 철학 자체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영국 철학자라고 하면 존 로크와 데이비드 흄을 떠올릴 것이다. 영국 철학을 대변하는 이 두 철학자는 인간의 인식에서 경험과 이성의 역할 중 경험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들에게 인식의 대상이 되는 세계는 자연 세계, 물리적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고 인간의 생활 세계는 무시하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흄의 『인성론』의 ‘정념론’과 ‘도덕이론’이 부각됐는데, 인간의 감성이 사회적·도덕적 삶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며 이를 위해서는 세계를 자연적·물리적 세계로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적·도덕적인 생활 세계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로크와 흄에서 비롯되는 고전 경험론의 경험·과학적 측면만 크게 발전시킨 실증주의의 영향 때문에 물리적 세계에 대한 탐구가 20세기까지 영국 철학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들어 인간이 사회적·도덕적 관계를 맺고 사는 생활 세계에 비중을 두는 흄의 『인성론』 후기 입장과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입장이 주목을 받으면서, 이러한 입장이 오히려 독일 현대 철학에서 발전된 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생활 세계를 강조하는 훗설 후기 현상학과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인간에 관한 규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주목 받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한편, 프랑스 철학의 수용은 영국 전통의 형이상학적 개념에 대해 재고해 볼 것을 촉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시간론, 기억 이론, 인간의 동일성 이론 등에 대한 전통적 이론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20세기 영국 철학을 지배해 온 맥타거트(J. M. E. McTaggart)의 이론, 즉 시간이란 ‘시제의 변화(현재란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사건들의 연속을 따라서 움직이는 어떤 것)’이거나 ‘사건들 간의 선후 또는 동시 관계에 관한 비지표적 명제’라는 그의 이론보다 현상학적 체험을 강조하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으로서의 시간 이론이 인간을 설명하는데 더 적합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기억 이론에 있어서도 영국 철학의 전통적 이론인 로크와 흄의 과거 회고적(retrospective) 역할로서의 기억이론보다 미래 예측적인(prospective)것까지 포함하는 ‘체험적 기억’(experiential memory)이론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인간의 동일성 문제에 관해서도 마치 스토리가 발단-전개-결말을 통해 하나의 일관성 내지 통일성을 가지듯 인간의 삶도 과거-현재-미래가 연결된 통일적 구조 내지 형식을 갖는다는 네러티브(Narrative) 이론이 인간의 동일성과 삶의 연속성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독일 철학이든 프랑스 철학이든 영국 철학자들이 대륙 철학을 수용한 이유는 단순한 수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국 철학적 전통을 바탕으로 그 전통에 대한 폭을 넓히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큰 조류는 영국 철학 자체 내에서 자신의 전통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것에 따르면 철학의 역할은 자연 세계의 신비를 해명하는 것이다. 소위 영국 형이상학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철학적 동향에 따르면 물리 세계에서 예컨대 설탕은 용해성이라는 ‘성향’(disposition)을 그 근본 구조로 갖고 그러한 성향이 실재한다. 그런데 그러한 성향이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발현하는 ‘성향적인’(dispositional)것이냐 아니면 조건이나 상황과 무관하게 발현하는 ‘무조건적인’(categorical)것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전통의 뿌리는 존 로크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경험주의자로서 로크는 경험주의 원리, 즉 ‘감각에 주어지지 않는 것에 관해 우리는 어떠한 관념도 가질 수 없다’는 것에 입각해 철학을 했지만, 감각 저 편에 있는 실재세계의 배후에서 실재를 가능케 하는 실체의 존재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 형이상학의 문제, 즉 실체의 형이상학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성향에 관한 ‘성향적(조건적) 실재론’과 ‘무조건적 실재론’ 논쟁은 로크가 관념을 가능케 하는 실재의 본질을 ‘명목적 본질(nominal essence)’과 ‘실질적 본질(real essence)’로 구분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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