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 프로이트와 데리다의 애도 이론으로 이태원 참사를 마주하다

지난해 벌어진 이태원 참사로부터 백 일도 채 지나지 않았던 지난달 4일, 광화문광장에 분향소 설치를 요청한 유가족은 서울시의 철제 울타리와 경찰 버스 앞에서 돌아서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유가족이 자체적으로 마련한 임시 분향소마저 이를 철거하라는 서울시의 압박에 시달리는 중이다. 참사로 159명의 가족, 연인, 동료를 잃은 슬픔과 싸워온 이들은 이제 슬퍼하지 않으려는 시도와 싸우게 됐다. 온전히 애도할 수 없는 분위기 속,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떻게 애도해야 할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자크 데리다는 각각 남은 자와 떠난 자의 관점에서 진정한 애도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그들의 애도 이론으로 한국 사회가 이태원 참사를 애도하는 방식을 돌아봤다.

 

애도가 불가능한 사회

현재 상황에서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제대로 된 애도가 이뤄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태원 참사 직후부터 지금까지 유가족과 피해자들에게 참사의 원인을 돌리고 이들을 비난하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고 있다. 김성회 전 대통령실 비서관은 자식들이 놀러 가는 걸 왜 막지 못했냐며 유가족을 비난했고 경찰은 피해자들 속에서 일명‘토끼 머리띠’를 찾겠다며 책임 돌리기에 나섰다. 김석 교수(건국대 철학과)는 “유가족들이 참사의 충격 속에서 미처 제대로 슬퍼하기도 전에 가해진 2차 가해는 유가족들에게 상실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라고 진단했다. 

이에 더불어 참사에 책임이 있는 정부는 애도를 독점하는 방식으로 참사를 지우려 했다. 일방적으로 선포된 국가 애도 기간에 정부가 마련한 분향소에는 영정 사진 없이 거대한 국화탑만이 무의미하게 차려졌다.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진상규명 시민참여위원회 이재근 간사는 “국가에 의해 독단적으로 정해진 일주일의 국가 애도 기간은 참사가 일어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어려운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김석 교수 역시 “정부의 이런 행태는 죽음을 덮고 공론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임시 분향소를 둘러싼 서울시와 유가족의 갈등은 우리 사회가 제대로 애도하고 있지 않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이재근 간사는 “분향소는 책임자 처벌, 국가의 공식 사과가 없는 상황에서 유가족들이 시민들을 만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기한을 정해놓고 철거하라는 요청에는 응하기 어렵다”라고 전했다. 그는 “임시 분향소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애도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렇듯 상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에서 애도의 실패로 귀결된다. 김석 교수는 “상실한 대상이 무엇인지 알더라도 상실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애도에 실패한 것”이라며 “2차 가해와 참사의 의도된 망각으로 촉발된 애도의 실패는 유가족들과 피해자들을 더욱 파괴적인 상태로 몰고 간다”라고 말했다. 그는 “2차 가해에 못 이겨 이태원 참사 두 달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159번째 희생자의 발생은 이와 무관치 않다”라고 덧붙였다.

프로이트는 이처럼 애도 작업에 실패한 상태를 ‘멜랑콜리’라고 칭했다. 한국현대정신분석학회장을 역임한 정경훈 교수(아주대 디지털휴머니티융합학과)는 “프로이트의 멜랑콜리는 개인이 감내하기 어려운 정신병적 우울증이다”라며 “프로이트는 애도 작업에 실패한 상태를 사실상 정신병적 우울증으로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손성우 강사(철학아카데미)는 “멜랑콜리 상태에서는 상실의 대상을 알 수 없기에 상실의 책임을 자아에 떠넘기고 맹렬하게 비난한다”라며 멜랑콜리가 일으키는 문제를 지적했다. 이어 “멜랑콜리의 자기 비난은 단순한 자기 탓이 아니라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나타났다는 망상적인 자기 비난”이라며 “자기 비난은 자살과 같은 자기 파괴적 형태로 나타난다”라고 덧붙였다. 

사회적 참사가 발생한 경우, 멜랑콜리는 더욱 문제가 된다. 한국현대정신분석학회 김소연 부회장은 “참사의 간접 경험이 자신의 경험 속 억압된 기억을 떠올리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시민들의 우울증적 반응이 촉발된다”라며 “사회적 참사가 당사자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멜랑콜리를 유발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의 성인 우울 수준은 8.76점으로, 2013년과 2015년의 점수가 각각 6.58점과 6.31점으로 비교적 일정했던 것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났다. 정경훈 교수는 “애도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은 서로에게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집단적인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기 때문에 애도를 통해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적으로 애도의 부재를 설명했다면, 데리다는 윤리적 관점에서 이를 설명했다. 데리다는 죽은 자의 관점에서, 애도의 부재는 그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고 본다. 애도의 성공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애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 상황은 타자에 대한 존중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죽음에 침묵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또 다른 모욕이자 상처다. 예컨대 애도를 독점함으로써 이태원 참사를 의도적으로 망각하려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데리다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애도에서 벗어난다.

각기 다른 관점이지만, 프로이트와 데리다의 두 이론 모두 현재 한국 사회가 이태원 참사에 대응하는 방식이 정상적인 애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애도는 어떻게 행해져야 할까.

 

남은 자를 위한 프로이트의 애도

프로이트는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를 떠나보내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성공적인 애도라고 본다. 이때 성공적인 애도와 실패한 애도를 결정하는 것은 ‘리비도’의 행방이다. 리비도란 일종의 정신적인 에너지로, 우리는 관계 속에서 애착을 품는 이들에게 리비도를 투여한다. 손성우 강사는 “프로이트에게 성공적인 애도는 살아있는 자가 망자에게 투자한 리비도, 즉 사랑을 회수하는 것”이라며 “쉽게 말해 내가 사랑했던 죽은 자에게서 정을 떼고 놓아주는 과정이 애도”라고 설명했다. 리비도가 정상적으로 분리돼 새로운 대상에 투여되면 기존에 리비도가 투여됐던 대상은 마음속에 의미를 남기고 떠나간다. 그때 우리는 슬퍼하기를 멈추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리비도가 정상적으로 분리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김석 교수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연구한 라캉과 라카프라에 따르면, 상실의 경험이 받아들여져야 한다”라고 답했다. 리비도가 정상적으로 분리되기 위해서는 리비도가 투여되고 있었던 대상이 상실됐음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비도가 분리되지 않으면 리비도는 남은 자의 자아에 투여된다. 손성우 강사는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이 자아의 상실로 바뀌게 되고, 상실한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를 덮치면서 상실한 대상과 동일시가 이뤄진다”라며 “그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 멜랑콜리, 즉 애도의 실패”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애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대상의 상실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상실했는지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김소연 부회장은 “이태원 참사에서 프로이트적 애도가 이뤄지려면, 표상될 수 없는 상실의 슬픔이 국가 애도 기간 동안 영정 사진과 같은 형태로 표상됐어야 한다”라며 우리 사회에서 애도의 시작이 올바르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나아가 김석 교수는 “추모와 진상규명, 국가의 책임 인정과 같은 통과의례로서의 사회적 의식을 통해 상실에 의미가 부여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떠난 자를 위한 데리다의 애도

한편 데리다는 프로이트 이론을 구체적으로 개념화한 아브라함과 토록의 논의를 뒤집으며 애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아브라함과 토록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공적인 애도를 내사로, 실패한 애도인 멜랑콜리를 융합으로 개념화했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와 정반대로 내사가 실패한 애도이며 융합이 성공한 애도라고 말한다. 왕은철 교수(전북대 영어영문학과)는 “내사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실된 대상을 기억하고 의미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는 타자를 삼키는 행위다. 손성우 강사는 “데리다에게 타자를 자신의 기억의 일부로 내면화하는 프로이트의 애도 작업, 즉 내사는 타자성을 배척하는 폭력이다”라고 해설했다. 때문에 데리다는 진정한 애도는 ‘부드러운 거부’를 통해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손 강사는 이에 대해 “사랑의 대상이었던 타자를 내면화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품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결국 데리다에게 슬픔의 지속은 애도의 성공이며, 슬픔의 중단은 애도의 실패다. 왕은철 교수는 “프로이트는 상실된 대상을 내면화하고 떠나보냄으로써 애도를 멈추는 것이 성공적인 애도라고 본 반면, 데리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음 이후까지도 사랑을 이어가며 계속해서 슬퍼하는 것이 애도의 본질이라고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애도의 성공은 종국적으로 애도를 중단하는 것이기에 실패고, 애도의 실패는 애도를 계속한다는 것이기에 성공이다.

데리다의 애도 이론은, 죽은 자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기억하고 슬퍼해야 한다는 시사점을 준다. 손성우 강사는 “끝나지 않는 애도를 한다는 것은 국가 애도 기간 같은 단편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다”라며 “죽은 자와의 관계성, 타자성에 대한 윤리적 측면을 지속적인 책임을 통해 가져가야 함을 뜻한다”라고 강조했다. 왕은철 교수 또한 “데리다 애도 이론의 핵심은 애도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죽은 자를 존중하는 것”이라며 “애도의 공간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태원 참사 분향소와 추모 공간이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다.

 

‘성공적인 애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상을 떠나보내는 것이라고 답한 프로이트와 영원히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이라고 답한 데리다의 견해는 일견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은 자가 상실을 바로 인식하고, 충분히 슬퍼하는 것이 애도의 시작이라는 측면에서 두 사람의 이론은 하나로 수렴된다. 프로이트에 따라 우리는 내면화된 기억을 통해 상실의 의미를 마주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데리다에 따라 그럼에도 떠난 자들을 끊임없이 애도하며 그들에 대한 책임을 계속 가져갈 수 있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네 달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애도는 아직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세상을 떠난 희생자와 그 유가족, 그리고 참사를 겪은 사회를 위한 애도의 방식을 고민할 때다.

 

삽화: 신윤서 기자

oo00ol@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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