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곽재구(시인)

지금은 잊혀진 말이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적 ‘밤을 하얗게 지새우다’는 말이 있었다. 긴긴 겨울밤 창문에 부딪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헤세나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를 읽으며 꼬박 밤을 새우고 난 뒤에 만나는 아침햇살의 선선함이라니…. 그런 날 가슴속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신뢰와 삶에 대한 용기로 따뜻하게 술렁이고 머리속은 박하꽃밭에라도 들어선 듯 환하게 맑아졌던 것이다. 일기장 한 모퉁이에 ‘하얗게 밤을 새운 아침이다’라고 적은 뒤에 학교로 가는 길이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1학년 늦가을로 기억된다. 교정에 늘어선 은행나무들이 노란 우산 하나씩을 들고 어디론가 떠나는 듯 싶은 오후, 그 나무 아래서 한 친구를 만났다. 그는 대뜸 내게 시 동인을 하나 만들자고 얘기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의 작은 알 껍질 하나가 부서졌다. 「백조」나 「창조」, 「폐허」, 「시인부락」과 같은 시 동인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어디까지 그런 이름들은 내게 까마득히 먼 별과 같은 이름들이었을 뿐이었다. 내 인식의 틀 안에서 동인이란 명망있는 시인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하늘과 같은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아, 동인이란 우리처럼 평범한 학생들도 만들 수 있는 것이구나’하는 깨우침이 찾아왔고, 그런 인식을 이미 지니고 있는 그 친구에게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함께 느껴야만 했다.

그 날 친구는 자신이 쓴 시 한 편을 내게 보여주었는데 그 또한 충격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시란 원고지에 고상하게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호주머니 한쪽에서 다 찢어지고 허름한 갱지 한 장을 내밀었고 그 위에 연필로 쓴 몇 구절의 시가 삐뚤삐뚤 적혀 있었다. 그 시의 첫 구절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데친 사과 빛의 얼굴을 하고 목각인형은 가을 속으로 떠나갔다.’

데친 사과 빛. 그 구절 앞에서 내 인식은 전율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나는 단 한 차례도 사과를 데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삭아삭 깨물어 먹거나 과도로 긴 껍질을 늘어뜨리며 깎은 뒤 조각을 내어 먹는 가을 과일 정도가 내가 아는 사과의 개념이었다. 그런데 그는 사과를 데친다는 전위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나보다 두 단계 혹은 세 단계 앞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학과 수업을 전폐했다. 그의 자취방에는 나보다 열 배는 많은 시집들이 있었다. 『달나라의 장난』, 『휴전선』, 『나비와 광장』, 『질마재 신화』와 같은 시집들의 존재는 나의 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다행히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공부에 취미가 없는 학생들에게 지극히 관대한 정책을 지니고 있었다. 어차피 입시 성적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내는 것이고 그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나머지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야구연습 구경을 하든 음악실에서 악기를 연주하든 은행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시를 쓰든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두세 편의 시를 썼으며 매일 한 권 이상의 시집을 의무적으로 읽고 일주일에 한 권씩의 문학평론집을 읽었다. 오로지 그 친구를 좇아 가기 위한 나만의 긴 항해가 시작된 셈이었다. 1교시가 시작되자마자 도서관에 들어갔고 별이 뜬 뒤에야 도서관을 나왔다.

도서관은 개가식이었다. 어느 날 시집들을 골라 나오다 그중 한 권이 벽 쪽으로 떨어졌다. 시집을 주으러 허리를 굽히다가 벽과 서가 사이에 끼여있는 책 한 권을 보았다. 힘들여 책을 꺼내놓으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이 뚜렷이 보였다. 해방 직후 정음사에서 나온 윤동주의 시집 초판이었다. 그때 내 마음 안에서 지진이 일었다. 어차피 책꽂이 뒤에 떨어져 있던 이 시집은 아무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책이었을 터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그 책을 교복 상의 안에 집어넣었으며 쿵쿵거리는 가슴으로 사서 선생님 앞을 지나왔다.

그날 저녁 나는 친구의 자취방을 찾았다. 이거 봐라, 윤동주 시집 초판이다. 기세 좋게 내가 얘기했을 때 녀석은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너 이 시집 어디서 훔쳤어? 라고 물었다. 헌책방에서 샀노라 애써 얘기했더니 나랑 그 헌책방에 가자는 것이 아닌가. 얼버무리고 녀석의 자취방을 나왔지만 마음은 이미 좌불안석이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녀석이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에게 고자질을 할 것만 같았던 나는 그날 밤 꿈에서 녀석의 신고로 경찰서에 붙들려 가는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다음날 나는 교복 안에 다시 그 시집을 넣고 도서관 서가 앞에 섰다. 그리고는 서가의 한쪽 귀퉁이에 시집을 꽂아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날부터 도서관에서 내 첫 번째 일은 시집이 그 자리에 잘 있는가 확인하는 것이 되었고 나흘째 되는 날 시집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끝내 시집은 보이지 않았다.

비록 녀석 때문에 윤동주의 시집을 잃었지만 나는 녀석보다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고등학교 시절 숱한 밤들을 하얗게 지새웠으니 녀석은 내게 분명한 생의 목표를 선물한 셈이다. 지금도 나는 녀석을 내 시의 스승으로 생각하며 가끔씩 만날 적이면 ‘사부, 잘 지내니?’라고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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