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부문 우수작- 심리학과00 고건혁

1. 차이밍량 감독은 다음과 같은 불만을 털어 놓는다: “사람들은 내 영화를 보러 올 때 자신이 아는 것만 보려 한다.” 작금의 관객들은 자신이 미리 훈련받은 방식으로만 영화를 본다. 주로 할리우드 영화들이 그들을 훈련한다. 인과 관계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 명백하게 만들며, 결국엔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이른바 ‘명백한 내러티브’가 영화를 보는 지배적인 방법론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긴 하지만 요즈음은 이러한 경향이 매우 압도적으로 나타난다. 매우 공격적이다. 예전에는 이야기가 명백하지 않았던 영화들을‘예술 영화’라고 부르며 나름의 경외 혹은 이해의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제 화를 낸다.
김지운 감독도 차이밍량과 같은 불만을 품을 만하다. 관객들이 그의 영화 「달콤한 인생」이 비난받는 까닭은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명백한 이야기에 대한 요구는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고, 누아르를 아는 관객은 이 영화가 누아르와 닮기를 요구하고 ‘뵨사마 이병헌’을 아는 관객은 ‘나이스’한 이병헌의 캐릭터를 원하며, 피를 덕지덕지 바르는 액션을 아는 관객은 흥분되는 액션의 향연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를 보여주지 않고 충족시켜주지 않는 「달콤한 인생」은 이들에게 아무런 여지도 갖지 못한다.
관객뿐만 아니라 평론가들 중 일부도 이런 종류의 비난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선우는 자신의 아버지 격인 보스(그는 조직과 가족을 동일선상에 놓고 말한다)의 여자를 욕망하고, 또 그 아버지를 살해하면서 오이디푸스의 여정을 따라간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에겐 있으나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 상황의 역전에 따른 지식과 깨달음이다. 1)

‘오이디푸스의 여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이 영화를 ‘미숙하다’고 평가한 평론가 김소영은 이 영화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한 이론 도식을 영화로 구현해주길 바랬나 보다. 하지만 선우와 보스의 관계가 아비-아들 관계와 유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내러티브가 오이디푸스적 궤적을 따라야한다는 것은 넌센스다. 세상에 모든 아비-아들은 오이디푸스적이라야 하는가?
이야기를 기대하고, 누아르를 기대하고, 오이디푸스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영화의 독자성은 거세된 채, 그저 상호 텍스트적으로 구성되는 것일 따름이다. 영화 바깥의 텍스트들, 이를테면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내러티브 영화나 누아르 영화, 연예산업에서 이병헌의 이미지, 피칠하는 액션 영화, 프로이트와 라캉까지, 이들에게 「달콤한 인생」의 의미는 이러한 바깥의 텍스트에 의해 구성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작 「달콤한 인생」 영화 자체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영화 자체를 무시하고 영화를 보는 것, 상식적으로 이걸 제대로 된 영화 보는 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라 단정하는 것은 물론 매우 건방진 일이다. 그저 나는 이 영화가 줬던 형언할 수 없는 스산함과, 이 영화를 보고 왈칵 쏟아진 눈물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이 얘기는 위의 불만에 차이밍량이 덧붙인 “나는 당신들이 모르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말에서 시작할 것이다. 만약 김지운이 「달콤한 인생」을 통해 우리가 모르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낯선 것을 만나면 가져야 할 타당한 태도는 그것에 적합한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달콤한 인생」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접근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2. 이 영화에 대한 주된 불만은 인과의 불명확함이다. 대체 인물들이 왜 이따위로 죽고 죽이다 다 죽는 파국으로 이르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주먹만한 이야기를 몸체만큼 불린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거의 텅 비어 있다. 이야기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체계적으로 회피한 끝에 이 영화는 이병헌이 연기하는 주인공 선우의 입을 빌어 관객이 감독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하게 한다.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2)

내러티브가 인과 관계의 연쇄를 의미한다면, ‘내러티브가 텅 비어있다’는 평론가 김영진의 지적은 이 영화의 본질을 짚고 있다. 희수(신민아)가 바람피운 것을 눈감아줄 때부터 강 사장(김영철)을 쏴 죽이는 마지막 순간까지의 여정은 선우(이병헌) 스스로 자신의 행동의 이유를 탐구하는 질문의 연쇄다. 희수의 부정을 감시하기로 한 자신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키고 난 후, 강 사장이 던진 질문에 선우가 대답하지 못하는 까닭도 그가 질문의 연쇄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강 사장: 뭣 때문에 그런 실수를 한 거야?
선우: 두 사람이 만나지 않는다면 모두 좋아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강 사장: 아니, 그런 것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봐. 너 그 애 때문이냐?
선우: …네?

선우는 강 사장에게 버림받고 복수를 결심한다. 하지만 복수를 결심하는 이유도 분명하지 않다. 사실 강 사장도 마찬가지다. 그도 자신이 왜 자신에게 충성했던 선우에게 그리 가혹하게 굴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윗사람이 실수하더라도 아랫사람은 그에 따라야 한다’는 나름의 조직 논리를 제시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 그것은 진짜 이유가 아님이 밝혀진다. 그래서 둘이 본격적인 대결로 돌입하기 직전, 각자가 자신의 파트너들과 나눈 얘기에서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모르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한다.

(선우와 선우의 부하가 함께 있는 장면)
선우의 부하: 어떡하실 거예요?
선우: 모르겠다.
(강 사장이 다른 조직의 보스와 통화하는 장면)
강 사장: 이젠 이유가 중요하지 않아요.
(다시 선우의 모습)
선우: 모르겠는데
(강 사장의 모습)
강 사장: 어쨌든 끝은 봐야죠.
(다시 선우의 모습)
선우: 끝까지 가볼려고.

둘은 어떤 명백한 이유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행동한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이유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선우는 강 사장한테 가기 전, 자신을 린치한 백 사장(황정민)을 만나 복수하면서 제일 먼저 “너 나한테 왜 그런 거냐?”라고 묻는다. 일종의 예행연습이다. 예행연습을 마친 선우는 총을 들고 강 사장에게 묻는다.

선우: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강 사장: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선우: 아니,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봐요.

강 사장은 답변을 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흔들린 거냐? 그 애 때문이냐?” 그 역시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선우는 강 사장을 쏜다. 쓰러진 강 사장에게 말한다. “그렇다고 돌이킬 순 없잖아요?”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러한 파국에 이르게 됐는지. 이러한 파국을 목격한 김영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달콤한 인생」에는 왜가 빠져 있거나 그 질문을 과감하게 무시하고 있다. 인과관계의 고리를 고의적으로 흐트러뜨린 곳에서 김지운 감독은 시청각 잔치의 향연을 펼친다. 음식으로 치자면 양은 아주 작고 냄새는 향긋하며 정작 먹어본 맛도 강한 자극을 품고 있기는 한데 씹히는 것이 전혀 없는 스테이크다.3)
하지만 ‘씹히는 것이 전혀 없는 스테이크’라고 하기 전에 그는 ‘흐트러진 인과 관계의 고리’를 붙잡기 위해 이 영화가 초두에 제시하고 있는 명백한 단서에 주목했어야 했다. 이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는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나오고 흑백이었던 화면이 점차 색깔을 가지는데, 여기다가 선문답을 연상케 하는 내레이션이 얹힌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정확히 이 영화의 모든 움직임은 이 장면에서 선언한 바에 따라 이루어진다. 나뭇가지를 움직이는 것은 바람이요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지만, 본질적인 움직임은 그에 반응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라는 얘기는, 이 영화의 운동이 사건과 갈등이 아닌 인물의 내부에서 발생하고 이루어질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는 인물의 ‘성격’과 다른 것이다. 성격이 태생적인 것으로 딱딱한 규범 같은 것이라면-이를테면 야비한 성격의 문 실장(김뢰하)은 야비하게 행동한다-이러한 내부의 운동은 성격을 포함한 내면과 외부의 모든 자극,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을 결정하는 무작위의 변수까지 아울러 끝없이 변화하는, 물렁한 것이다.
인물의 내부에 ‘왜’가 갈무리돼 있음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시하는 것은 백 사장이다. 그는 복수하러 온 선우의 배에 되레 칼을 찔러 넣고 “네가 이렇게 된 이유를 모르겠지? 자꾸 딴 데서 찾는 거지?”라고 빈정댄다. 그리고 비로소 종국에 이르러 선우도 자신을 움직인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강 사장을 쏘기 직전, 그가 보는 것은 창문의 야경에 오버랩되어 비친 자신의 얼굴이다. 그것을 보고나서 그는 거리낌없이 강 사장을 쏜다. 더 이상 이유를 구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결국 움직이게 된 까닭이, 그리고 움직인 것이 자기 임을 깨달았으므로.
요컨대 이 영화는 ‘왜’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만 외적으로 명백하게 그것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내러티브 영화와 달리, 그것을 인물 내부로 수렴했다. 마치 이 영화의 인물들이 현실의 것들인 마냥, 우리가 밖으로 명백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속에서는 계속 꿈틀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마냥.
우리가 현실 속에서 타인에 대해 이해하려할 때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 있다. 상대방이 나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내부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동시에 나와 구별되는 독자성을 가진 존재임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주 선입견을 동원하여 편리하게 재단해버리긴 하지만, 그런 오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본질적인 한계는 모두들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바람도 나뭇가지도 아닌,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선우도 마치 실재하는 타인과 같은 존재다. 선우의 ‘왜’에 대한 접근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3. 김지운 영화에서 공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부터 공간에 대한 관심을 갖고 세트를 직접 구성했다. 이러한 경향이 극대화된 것이 「장화 홍련」이다. 소위 ‘벽지 호러’라고까지 일컬어진 이 영화의 공간은 그 전체를 통해 사춘기 소녀의 분열적인 심리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실재하는 공간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반칙왕」의 공간은 실제 서울의 공간임에도 ‘변두리 정서’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일관적인 정서로 조직되어 있다. 「메모리즈」에 이르면 공간이 완전한 핵심을 형성한다. 이 영화가 표현하는 공포 자체가 자생력 없는 ‘베드타운’, 분당신도시의 죽어있는 공간에 의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사물 하나하나의 배열이 의미를 갖는 섬세한 미장센의 배치도 아니고, 현실적인 공간 위에 일상의 오밀조밀한 디테일을 덧쌓아가는 방식도 아니다. 그의 공간은 인물이 겪고 있는 심리적 세계를 축약하여 통째로 축조해낸 것. 따라서 그의 공간 표현은 그것이 갖고 있는 질감에 의존하고 있다.
「달콤한 인생」의 공간은 그 질감의 차이에 의해 기본적으로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선우-또한 강 사장-의 공간: 선우가 일하는 술집인 ‘La Dolce Vita(달콤한 인생)’와 그의 아파트. 2. 희수의 공간: 희수가 사는 단독주택과 그녀가 연주하러 다니는 스튜디오, 그녀가 쇼핑하는 쇼핑몰, 그녀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댄스클럽과 선술집. 3. 좌절의 공간: 폭력의 공간들. 선우가 린치당하는 어시장과 그가 총기 밀매 조직원들을 살해하는 벌판의 아지트, 백사장을 응징하는 아이스링크.
선우의 공간은 어떠한 생명도 자라나지 못할 것 같은 곳이다. 세련된 생활이 과잉된 채 넘쳐나는 ‘La Dolce Vita’는 선우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지만, 그 공간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선우가 아닌 손님들이다. 그런데 주인인 손님들은 이 공간을 스쳐지나갈 뿐이어서, 그 결과 이곳에는 어떠한 생활도 없다. 선우의 아파트 역시 생활을 위한 물건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그저 잠만 자고 가는 직장의 부속 공간이다. 이 공간들은 모두 빌딩의 높은 층에 위치하여 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이 공간을 밝히는 것은 인공의 조명이다. 번들거림 혹은 무미건조함, 생활의 번잡함을 거세한 효율성, 결국 지독한 무생물성이 이 공간을 특징짓는 질감이다.
희수의 공간은 정반대로 ‘진짜 생활’을 체현하고 있다. 희수의 단독 주택은 선우의 아파트와 달리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으며, 생활의 번잡함이 넘쳐난다. 이곳은 전등 같은 자기 물건을 갖다 놓을 수도 있고, 물건을 사기 위해 혹은 놀기 위해 외출도 할 수 있는 진짜 생활의 중심이다. 이 공간을 바탕으로 희수는 동료들과 소통을 하면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가질 수 있으며, 직장의 남자 친구와 섹스를 하고난 후 사각팬티를 입고 활보할 수도 있다.
선우의 공간이 결여한 것, 그리고 희수의 공간이 갖고 있는 것이 선우로 하여금 희수를 욕망하게 한다. 하지만 단순하게 이것을 희수라는 바람이 선우라는 나뭇가지를 흔들리게 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선우가 자신의 공간을 영유하며 느끼고 있던 생활에 대한 갈망은 바람이 불기 전에 이미 스스로 꿈틀거리고 있던 것이며, 그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바람도, 나뭇가지도 흔들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욕망은 좌절된다. 희수의 공간은 선우와 똑같은 공간을 영유하는 강 사장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고, 따라서 어떠한 침입자도 용납해서는 안 될 곳이다. 그래서 강 사장은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황량한 공간으로 선우를 쫓아낸다. 콘크리트가 타설되다 만 채로, 철근과 합판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이 공간은 선우가 살고 있던 무생명의 공간의 원초적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폭력의 질서다. 선우가 살고 있던 세련된 삶, 과잉의 삶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폭력이었다는 것을 이 공간은 입증한다.
결국 자신의 삶의 근거를 깨닫고 난 선우는 원하는 것을 결코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만다. 그래서 그는 희수의 집 앞에 그녀가 갖고 싶어했던 전등을 가져다 놓고 자신이 얻고자 했던 것에 작별 인사를 한다. 그리고 총을 들고 와 자신의 세계를 파괴해 버린다. 그래도 강 사장과 마주할 때까지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욕망을 용납하지 않는 강 사장을 앞에 두고서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사실 이 영화의 ‘왜’는 분명한 것이다. 내러티브가 직설 화법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을 이 영화는 공간과 그곳에 놓인 인물 자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선우의 결여는 선우의 공간이 가진 결여에 의한 것이고, 선우의 욕망은 희수의 공간이 가지고 있는 생활이며, 선우의 파괴 행동은 그것이 좌절될 수밖에 없는 폭력의 공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공간을 영유하고 있는 인물은 자신의 세계에 반응하여 끊임없이 움직이는 내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지운은 이러한 공간을 그저 환상 속에 구축된 가상의 공간으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공간을 선우가 차를 타고 배회하는 세종로의 공간으로 연결시킴으로써 현실적인 맥락을 부여한다. 마치 정말로 이런 사람이 옆에 살다가 죽어가기라도 한 것 마냥. 그가 축조해낸 세계는 결국 우리 옆의, 혹은 우리 자신이 겪고 있는 심리적 세계를 표현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4. 선우가 경험하고 있는 공간과 그 공간이 집약하고 있는 주변 세계를 통해 그의 움직임을 발견해낸다는 것이 그렇게 새로운 발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 우리의 욕망이 생성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가 중첩된 현실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주변의 환경과 반응하며 움직이는 내부를 갖고 살고 있다. 우리가 행동하는 원인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오히려 흔치 않은 일이며, 심지어 돌이킬 수 없는 종착점을 향해 가면서도 그 원인은 끝끝내 명확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왜’는 그를 둘러싼 세계를 통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영화보기 방식을 통해서는 실제의 우리처럼 움직이는 「달콤한 인생」의 인물들을 이해할 수 없다. ‘명백한 내러티브’의 영화에 의해 훈련된 방식은 하나의 직선으로 인물의 행동을 꿰뚫어 버리려 한다. 인과 관계가 명백하게 표현되면 될수록 세계와 인물 사이의 상호 작용은 인과의 법칙에 휘둘려 그 복잡함을 잃어버린 채로 박제되고 만다. 이로써 관객에게는 오로지 ‘소실젼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시점만이 허용되고, 그 시점에서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관객은 영화 바깥에서 그것을 풍경으로 응시하며 머무르기를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인물이 이루고 있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세계를 느끼지 못하고 관망하는 채로는, 실재하는 우리의 삶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내면을 가진 선우의 삶이 어째서 ‘달콤하면서도 쌉쌀한(이 영화의 영어 제목: A Bittersweet Life)’ 것인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하물며 그 풍경을 명백한 내러티브나, 누아르나, 혹은 오이디푸스의 틀로 재단하며 그 틀 바깥에 있는 모든 요소들을 잘라내 버리고선.
이러한 박제의 대안은 선우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화면’이라는 2차원의 평면을 3차원으로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종의 3차원 가상현실의 공간에 돌입한 상황으로 생각해보자. 이제 시점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주어진 공간을 관객은 마음대로 배회할 수 있으며 다양한 시점으로 선우의 삶을 응시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는 시각의 확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2차원에서 봉인됐던 촉각은 3차원의 공간에서 확장된다. 여기에 이르면 이제 영화는 더 이상 ‘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 된다.
하지만 가상일 뿐인 영화를 실재에서나 기능하는 촉각으로 지각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전에 경험했던 촉각의 기억들을 인출하여 화면을 통해 제시되는 촉감들을 적극적으로 재현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네온사인의 도심을 배회하면서 촉각으로 받아들였던 느낌이 선우가 매일 느끼고 있었던 그런 느낌이다. 동거인이 없는 원룸 아파트를 그저 먹고 자기 위한 공간으로 영유하면서 느끼는 촉감, 선우도 그런 느낌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한 세계 안에서 선우는 진짜 생활의 느낌을 갈망했고, 그 세계를 파편적으로나마 경험하며 우리는 선우를 갈망하게 한 것이 그를 둘러싼 세계를 포함한 그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우리가 낯선 세계의 낯선 인물을 만났을 때 그를 지각하고 인지하는 방식과 흡사하다. 타인의 낯선 세계와 마주친다는 것은 타인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거리를 느끼게 함과 동시에, 두려움에 비례하여 그것을 알고자 하는 욕구를 자아낸다. 이러한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오감을 동원하게 한다. 설령 자신의 이해가 온전한 것이 아니고, 심지어 본질을 오해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실 본질 자체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낯선 선우의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드디어 처음의 선문답과 대구를 이루며 마무리 짓는 최후의 선문답에 이를 수 있다.

어느 깊은 가을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니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니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울었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문답에 이어지는 것은 야경을 바라보며 한껏 폼을 잡고 섀도복싱을 하는 선우의 모습이다. 결여를 깨닫고 갈망하게 되어 파국에 이르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나 기 전, 자신의 삶의 ‘달콤함’에 대해 만족했을 그 순간의 모습을 다시금 목격하면서 우리는 왈칵 눈물을 쏟을지도 모른다. 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의 삶의 편린을 분명하게 체험했으므로.

5.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라는 매체를 처
음 접하는 관객들에게 화면을 통해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선보였을 때, 관객들은 기차가 자신들을 덮칠 거라 생각하고는 넙죽 엎드려 버렸다. 그들에게 화면 속의 가상은 화면 바깥의 실재와 구분되지 않는 것이었고, 화면 속의 세계는 실재하는 세계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영화 매체의 가능성에 일찍이 눈 뜬 영민한 영화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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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들이 클로즈업과 몽타주를 발명함으로써 더 이상 관객들은 이러한 경험을 하지 않게 되었고, 영화는 가상임이 명백하게 선언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상임을 선언한 영화는 동시에 자기 안에 디제시스라 일컬어지는 허구의 실재를 구축한다. 매치 커팅, 아이라인 매치, 180도 규칙4)과 같이 편집에서 발생하는 화면들의 이음새를 덮어버리기 위해 발명된 장치들이 관객들에게 자연스러움을 선사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영화 속의 세계야말로 정말 실재하는 것인 마냥 받아들이게 했다. 특히 ‘질서-무질서-질서의 회복’이라는 내러티브 체계의 발명이 이러한 상황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질서의 회복이 주는 안정감은 그것을 현실로 인정하게 할 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발명된 지 한 세기가 지나가는 시점에 이르자, 오히려 가상의 지각 방식이 실재를 지각하는 방식을 대체해 버렸다. 세계는 풍경이 되었고 타인은 풍경 속의 인물, 혹은 풍경 그 자체가 되어 우리는 멀리 떨어져 영화를 보듯 그것을 응시한다. 내부와 외부를 명백하게 구분하는 이러한 구도 안에서 각각의 사물이 지닌 독자성 같은 건 의미가 없어진다. 영화가 제공하는 ‘무질서의 회복’이라는 안정감이 사물들의 독자성을 지우는 데 한 몫 거든다. 풍경으로 박제된 실재의 세계를 질서라는 아교를 덮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달콤한 인생」은 달려오는 기차를 보며 두려워했던 이들의 원초적 경험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물론 전형적인 영화적 문법에 충실하며 내부에 완결적인 디제시스를 구축하고 있는 이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가 선사했던 원초적 경험을 그대로 재현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철저한 가상이면서 원초적 경험을 다시 상기시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가상이 실재를 대체한 상황을 패러디하며 이 영화는 가상인 자신을 실재의 연장으로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응시하는 관객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선우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박제를 해체하는 훈련을 가능케 한다. 너무 쉽게 ‘왜’를 규정하며 타인을 박제하려 드는 우리에게, 왜를 설명하지 않는 선우는 ‘타인’이라는 존재의 불가해성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왜’를 탐구하는 선우의 여정을 좇아 그의 세계를 거닐며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갖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선우의 세계는 한없이 낯설 뿐이지만, 감각의 기억을 인출하여 그의 공간을 느낀다는 것은 낯선 세계들을 만나게 하여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고한다. 그리하여 박제가 해체되고 완전한 0에서부터 이해가 시작되며 실재는 가상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김지운의 기획은 ‘리얼리즘’의 의미를 새로이 하려 했던 프랑스 누벨바그의 기획을 연상시킨다.

아무튼 그건 리얼리즘이 거둔 최대의 이득이다. (중략)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이 15분 동안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당신은 말을 멈추고 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죠? 우리는 밥을 먹고 있고 레스토랑에 있어요. 저는 당신에게 바다와 휴가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15분 동안 우리가 겪었던 장면을 묘사해야 할 경우 가장 리얼리즘적인 방법은 이 레스토랑에서 우리 두 사람이 식사하는 장면을 보여 주거나 우리가 이야기했던 파도와 모래사장을 보여 주는 걸까요? 아니면 이 모든 것을 조금 전에 우리가 얘기했던 방식이 아니라 그 순간 그에 관해 머릿속에 떠오른 조화롭고 상관적이지만 간혹은 모순되기도 하는 이미지들을 보여줌으로써 일까요?”5)
일련의 영화 작업을 통해 전통적 문법을 뒤엎고 디제시스의 허구적 실재를 혼돈으로 뒤섞어 놓음으로써 알랭 레네가 바랐던 효과는 현실을 지각하는 방식을 가상의 세계에서 재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김지운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가상을 실재의 연장으로 인식시키려 하고 있다. 「달콤한 인생」이라는 ‘스테이크’를 씹기 위해서는 그가 축조한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이 가상의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서 실재의 공간을 영유하는 것처럼 서성거리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씹히는 것이 없는 스테이크’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 스테이크를 씹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현실이라는 것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껏 클로즈업된 이 영화의 인물들 옆에 형성된 여백은 마치 우리에게 그 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듯 보인다.6)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상세계에 살고 있는 네오에게 두 개의 알약을 내밀며 가상의 세계에 남아있을 것인지 아니면 실재의 세계로 갈 것인지를 묻는 선지자 모피어스처럼. 만약 모든 것을 잊고 가상의 세계에 남아 있을 수 있는 파란 알약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화면 바깥에 떡 하니 앉아 선우를 바라보며 대체 그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이며 그의 움직임이 무엇인지를 여백으로 남겨둔 채로 응시할 것이다. 반대로 실재 세계로 가는 빨간 알약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선우가 체험하는 공간으로 들어가 서성거리게 될 것이다. 서성거린다는 것은 누군가가 설정한 내러티브의 명백한 인과에 사로잡혀서 한쪽으로만 움직이는 것도, 남근에 종속된 채 어딘가 결여된 채로 오이디푸스적 여정을 밟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세계와 선우의 세계의 낯선 만남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실재에 대한 시각을 회복할 것이며, 비로소 「달콤한 인생」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실재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1)김소영, 「깨달음 없는 오이디푸스의 여정」, 『씨네21』 501호, 2005년 5월 4일자.
2) 김영진, 「한국의 대중 영화는 어디로 가나」, 『FILM 2.0』 229호, 2005년 5월 3일자.
3)김영진, 앞의 글.
4)매치 커팅(match cutting)은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의 편집이 행위나 주제, 소재에 맞게 조화를 이루는 것. 아이라인 매칭(eyeline matching)은 한 등장인물이 스크린 밖 공간을 쳐다보고 있으면 관객은 그가 보는 것을 보게 되리라고 기대한다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등장인물이 볼 것을 관객이 보도록 하는 장면이 바로 이어서 따라오는 것. 180도 규칙은 관객의 시점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하나의 직선(상상선)을 설정하여 카메라가 그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을 의미한다. (수잔 헤이워드, 『영화사전: 이론과 비평』, 한나래, 1997.) 헤이워드는 이러한 장치들이 화면과 화면 사이의 단절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이음매 없는 연속성’을 만든다고 지적한다.
5) 임재철 엮음, 『알랭 레네』, 한나래, 2001.
6) “이 영화는 근래에 소개된 한국영화 중에서 클로즈업을 가장 유려하게 사용한 영화다. 이 영화는 2.35:1의 화면에서 클로즈업을 구사할 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화면의 여백을 역으로 효율적으로 활용한다. 배경을 완전히 포커스아웃 시키고 얼굴의 위아래를 화면에 가득 채운다. 이때 화면의 여백은 말 그대로 여백이 되는데, 이것이 인물의 얼굴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문일평, 「서명된 이발소 그림, <달콤한 인생>」, 『계간 영화언어』, 2005년 여름호.) 클로즈업은 부각된 인물의 얼굴을 앞으로 돌출시키고 얼굴 주위의 여백을 뒤로 물러나게 함으로써 입체적인 굴곡을 형성한다. 마치 관객이 들어가서 머무를 수 있는 틈새를 형성하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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