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부문 우수작-박혜미

하늘이 물(物)을 있게 함에 반드시 그 재질에 따라 인한다 하였으니, 과연 그러한가?

내 나이 올해로 쉰이다. 나이 오십에 공자께선 천명을 깨달아 아셨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미혹함 속에서 헤매고 있으니 생각해보면 어리석음뿐이다. 사람의 한평생이 하루살이의 하루와 다르지 않으니 무엇 때문에 그리 기뻐하고, 성내며, 슬퍼하고, 즐겼는고? 어째서 생은 이렇듯 가벼운데 운명은 인간을 틀어쥐고 희롱하는 것인가. 애닳도다. 인간의 미약함이여. 한평생이 어제의 꿈과 구별되지 않구나. 만사는 춘몽과 같아 아무런 흔적도 없다(事如春夢了無痕)고 한 것은 누구였는가.

나는 본디 허약한 체질이라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다. 스물하나가 되던 해 여름에 낙마하여 크게 다쳤다. 의원은 귀흉귀배(龜胸龜背)는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몇 달 후에는 풍비(風痺) 증세도 나타났다. 약에 의지하여 근근이 구차하고 질긴 목숨을 이었다.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고 혼자서는 걸을 수 없었다. 붓조차도 제대로 잡을 수 없던 것은 진실로 수치였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존재도 아니었다. 절대적인 병마 앞에서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살덩어리일 뿐이다. 밤이 되면 곁의 종을 물리고 홀로 앓았다. 홀로됨이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공포는 날로 몸 안을 파고들었다. 침묵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너무나 견고하여 간간이 울리는 신음소리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병들은 나에게서 생겨나 완결된 독립체가 되었다. 밤은 틈을 엿보는 어둠이었다. 무서웠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고통은 끊임없이 온 몸을 자극하며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몹시 떨었고 나약함에 굴복했다. 불면의 밤 위로 별들이 떨어져 내렸고 새벽녘의 허기진 꿈자리는 사납고 흉흉했다. 내 몸뚱이는 철저히 무력한 동시에 온 존재를 짓누를 만큼 무거웠다. 날마다 헛것을 보았다. 머리를 산발한 광인이 나를 조롱했고 어느 순간 그는 나였다. 절망은 깊었다. 차라리 뜻이나 품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나는 젊었다. 얄팍한 재능인줄도 모르고 교만했다. 이제 개세지재(蓋世之才)의 뜻은 꺾어졌고 가슴에 품은 청운의 뜻은 흩어져 버렸다. 벼슬에 나아갈 수 없음으로 나는 죽었다. 그 고통은 지금껏 차곡차곡 쌓아온 치세(治世)와 안민(安民)의 포부를 밀어내고 대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왜 병을 얻게 되었던 것인가. 나는 여러 번 되물었다. 사람이 병을 얻는데 아무런 까닭도 없다면 이는 하늘이 어질지 못한 것이고 필연성이 있다 해도 내 병은 사고이므로 우연에 가깝다. 그렇다면 내가 온전치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사기 열전(史記 列傳)의 첫 장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이다. 이들은 어질고 행실이 고결했지만 굶어죽었고 안연(顔淵) 역시 뛰어난 재주로 이름이 높았지만 가난으로 굶어죽었다. 그런데 극악무도한 도척(盜拓)은 날마다 죄 없는 이를 죽이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지만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사마천은 묻는다. 어떤 이는 천도(天道)는 공평무사해 항상 착한 사람을 돕는다 했거늘 하늘이 진정 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이것이 하늘의 도리라면 옳은 것인가? 그렇다. 사마천이 죽고 나서 천 년이 지나도록 하늘은 여전히 무심하다. 인간사의 혼란이 극심하여 하늘이 인간을 저버린 것인가? 이는 분명 바른 이치가 아니다. 나의 원망과 울분은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었다.

오그라든 근육을 달래며 누워 있기를 반년을 하자 아버님께서는 나의 나약함을 크게 꾸짖으시고 물으셨다.
“재주가 있으되 쓰이지 못하는 자와 재주가 없어 모자람을 한(恨)하는 자 중 누가 더 가여운 것이냐?”
“…….”
긴장이 앙금처럼 서서히 방 안에 깔리었다. 명치가 저렸다.
“그리하면 사족(士族)으로 태어나 아둔한 자와 재주와 기개를 지니고도 천하게 태어난 자 중 누가 더 나은 처지에 있는 것이냐?”
“소자가 불초하여…”
답을 알지 못하는 것인지, 대답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를 답답함이 슬픔이 되어 눈앞이 흐려졌다.
“내 이미 담양에 사람을 보내 준비를 해놓았으니 내려가서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길이 멀고 험하나 도성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답을 찾으면 언제든지 올라 오거라.”
하오나 아버님. 이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도,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리도 큰 짐을 안기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소자, 천 길 만 길 시커먼 흙구덩이로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북망산 가는 길이 이러합니까, 유명(幽明)의 경계가 이러합니까….
아버님의 애잔한 눈길이 한순간 내게 닿았다 이내 거두어졌다. 부질없는 말들을 지그시 누르며 삼키자 속에서 무언가가 아우성쳐댔다. 눈물처럼 진득한 땀이 배어나 옷이 흠뻑 젖었다. 나는 밤이 깊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내내 한기(寒氣)에 떨었다. 가끔씩 촛불이 크게 일렁였다.

담양은 선산과 문중이 있는 나의 뿌리였다. 어사화를 꽂고 풍악과 광대를 앞세우며 유가(遊街)를 하는 금의환향 대신 가마에 실려 내가 태어나고 글을 배웠던 곳으로 돌아왔다. 몇 년 만이던가. 마중을 나온 얼굴들은 낯설어 세월이 흘렀음을 알게 하는데 대(竹)는 여전히 높고 푸르러, 그 많던 날들이 하루 같았다. 조용히 마을 외곽의 별채로 들어서 주변을 정리하고 나자 흐렸던 하늘이 비를 내렸다. 비가 대밭을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대를 들여다보다 기진맥진하여 잠이 들었다.
한양에서 사군자를 치고 세죽을 볼 때 나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가파른 수직성의 아찔함이 결여된 대는 어떠한 답답함이나 위태로움도 지니지 않았으므로 나를 사로잡지 못했다. 어렸을 적 대숲에 들어가면 나는 늘 길을 잃었다.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어둑했고 방향을 구분할 수 없었다. 고개를 위로 쳐들어 보면 대들이 빽빽이 솟아 있었다. 하늘은 한 뼘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끝을 가늠해보다 현기증을 느끼고 주저앉았다. 굳건히 땅을 딛고 서 있어도 구름을 밟고 서 있는 것 같았고, 곧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감정에 휩싸여 매일 대를 보러 와서는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일어나곤 했다. 그때 내가 느낀 막막함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한번 분을 못 이겨 발을 구르고 대를 마구 흔들어 댄 적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꿈을 꾸곤 하는데, 번번이 어린 나는 간절히 갈망하는 눈으로 대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고는 힘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린 것의 작은 어깨가 애처로워 도와주려고 하면 절망적인 눈빛으로 고개를 흔드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을 도울 수 없다는 듯이.

마을 초입에 들어서 크고 단단한 대를 보았을 때, 비로소 내가 담양에 와 있음이 실감났다. 한양의 가느다란 대와는 다른 생김새와 바람이 얼굴을 스치자마자 대번에 되살아나는, 싱그럽지만 어딘가 건조한 냄새를 지닌 이런 대는 유년의 대와 꼭 같은 것이었다. 담양에는 잘생긴 대가 많았다. 마을 어디를 가도 무리지은 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대숲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글공부를 하다가도 대숲에 바람이 일면 마음을 빼앗겼고 자다가도 대숲에 비가 내리면 홀린 듯 일어나 밤을 지새웠다. 문리(文理)가 틀 무렵에는 책을 보는 것보다 대를 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관례를 마치고 내가 정한 호는 죽치(竹癡)였다. 무엇에 그렇게도 끌렸는지는 알 수 없다. 댓잎이 흔들리는 소리 때문이었을까. 그 소리의 처연함은 오랜 시간 동안 대와 함께 하지 않은 자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귀가 익숙해지면 이제 그 서걱서걱 일렁임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죽림칠현이라, 은거하는 자들은 그 소리에 싸여 소요(騷擾)에서 멀어져 세상을 잊게 되고, 죽장망혜(竹杖芒鞋)라, 떠나는 자들에겐 길을 재촉하며 길 위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것이다.
소리가 아니라면 본디 허망하고 찬 성질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는 사시사철 푸르나 기운은 생동함보다는 스산함이다. 대를 베어서 악기를 만들 때 음은 바람이 드나들던 빈 곳에서 나온다. 사람이 한숨을 뱉어 내면 더운 호흡은 곧 바람이 되어 사라진다. 음이 사라진 곳에는 미묘한 떨림만이 남는다. 실하게 꽉 들어찬 대는 세상에 있지 않다. 대는 그러한 것이다. 대는 일생을 두고 천천히 자라는 것이 아니라 죽순이 나고 한 달 동안에만 자란다. 나머지는 그저 굳어지고, 단단해지는 것이다. 또한 한 해에 대가 왕성히 돋아나 풍성하면, 이듬해는 거의 흉년이고 설사 난다 하더라도 가는 것만 돋는다. 화무백일홍(花無百日紅)이라, 사물이 이미 성하게 되면 기우는 것은 응당 자연의 이치이나, 대는 꽃을 피우면 반드시 몇 해 안에 말라 죽으니 일생에 단 한 번 꽃을 피우는 것이다. 내년도 내후년도 마른 가지에 물기가 돌고 힘을 내어 꽃을 틔울 것이라는 당연한 기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가 꽃을 보면 주변의 다른 것들도 따라서 개화하고 따라서 죽으니 꽃은 아름답고 밝은 것인데도, 대꽃을 보면 사람들은 흉사라고 걱정한다.
그리고 대의 찬 성질은 열을 내리고 화를 푸는데 효험이 있다. 불에 구웠을 때 나오는 기름 같은 진액을 죽력(竹瀝)이라 하는데 답답하고 갈증이 날 때 쓰인다. 열담(熱痰)과 번뇌를 다스리고 병으로 잠을 이룰 수 없는 경우에도 좋다 한다. 인간은 피가 더워, 괴롭고 슬프면 가슴 속에 열이 쌓인다. 인간사의 수많은 부침(浮沈),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아픔, 풀 수 없는 한스러운 매듭은 흔적을 남긴다. 잊지 말고 두고 두고 기억하라는 듯 반드시 뜨거운 열을 그득 남긴다. 스스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열은 가슴을 태워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 결국엔 자기 자신도 집어 삼키고 마는 것이다. 이를 대는 자신의 찬 잎으로 덮어 가만히 식혀 준다. 제 속에 바람을 지니고 사는 숙명으로, 굽이굽이 관계에 얽혀 있는 인간을 위무(慰撫)한다. 대는 조화옹의 재주로 생긴 것이 아니리라. 그 순탄한 조화 안에 있지 못하고 저만이 아는 질서에 따라 꽃을 피우고 죽는다.

꿈에서조차 대를 보던 시절은 부임하시는 아버님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오면서 끝이 났다. 나는 불철주야로 글공부에 매진했다. 몇 년 후에 있었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했다. 대를 보며 어렴풋이 느꼈던 무상감은 아문 상처처럼 희미한 흔적만 남았을 뿐이었다. 출사하여, 내가 배운 학문을 세상에 구현하고 싶었다. 선현(先賢)의 이치는 밝고 깨끗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가여운 일이지만 이는 학문과 현실의 괴리를 알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학문은 태평성대와 난세를 가리지 않는다. 어느 시대이건 고고(孤高)하고 맑아서 위태로운 것이 학문이다. 유학이 보여주는 사회는 아름다웠다. 절대 손에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그러하듯이. 맑고 투명할수록 그만큼 깨지기 쉬움을 왜 몰랐던가. 단지 현실감각이 부족했다고 말하기엔 미흡하다. 그보다 인식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나의 인식에서는 배움과 이해는 하나였고 이해와 적용도 하나였다. 이해와 적용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나는 그 사이에 많은 층위가 겹겹이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치에 밝지 못했다. 그러나 지나보니 이 시절 역시 흐릿하기만 하다. 개미의 왕국(槐安國)에서 태수를 지내던 남가지몽(南柯之夢)의 꿈이라도 꾼 것일까. 옛 어른들은 부귀영화와 세속의 성공이 거품 같이 가벼운 것임을 꿰뚫어 보시고 경계하셨으니 과연 혜안이로다.

내려온 다음날 대숲에 들어갔을 때 사고 이후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초여름이라 대들은 왕성히 자라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죽순이 돋아나고 새 잎이 나서 잎갈이를 했다. 땅은 전날 내린 비를 머금어 부드러웠다. 습기가 느껴졌으나 축축이 감기지 않고 상쾌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잎들은 야단스럽게 흔들리며 반짝였다. 이미 산송장이나 다를 바 없다고 여겼건만 자극을 받자 감각은 생생히 되살아났다. 살아서 살아있는 것들과 대면하고 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물기어린 잎들이 햇볕을 반사해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자 갑자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명을 잉태하고자 하는 여인이 흡월정(吸月精)을 하듯이, 밭은 숨을 몰아쉬며 필사적으로 크게, 크게 대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굽은 등이 시려 더 이상 있을 수 없을 때까지 나는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낙마하던 그날은 비가 몹시 내렸다. 퍼붓는 빗속에서 천둥에 놀란 말이 날뛰었다. 아직 사람 손에 익숙해지지 않은 어린 말은 진정시키려는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번개에 발광하여 나를 떨어뜨렸다. 말발굽 아래로 떨어질 때 살고자 하였던가. 아니다. 살게 되면 사는 것이고 죽게 되어도 어쩔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정녕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 어떻게 죽음 앞에 담담할 수 있겠는가. 나는 태연을 가장함으로써 불구가 된 나 자신을 부정했던 것이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새털같이 많고 많은 날들이 두려웠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고통의 무게가 또한 두려웠다. 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두려웠을 뿐이다. 몸 깊숙이 고여 있던 원망, 통한, 미움을 모두 토해내고 맑은 기운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는 예전처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오래도록 살고 싶었다.

그런 날들이었다. 구름이 한 번 지나가면 하루가 지나갔고, 바람이 불어오면 새 날이 밀려왔다. 계절은 여러 번 바뀌었고 떠나는 것과 오는 것 사이에서 나는 즐거웠다. 날씨가 화창하고 흥이 나면 종종 멀리까지 나가 해질녘이 되어야 돌아오기도 했다. 생활은 안정적이었고 마음은 고요한 물처럼 평정을 잃지 않았다. 글을 많이 쓰지 못해 글씨는 늘지 않았으나, 공부는 틈틈이 했다. 붓은 꾸준히 잡아 겨우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바라는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는 자족적이고 소박한 날들이었다.

당저(當苧) 병진(丙辰)년. 아버님께서는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운명하셨다. 올해가 신사(辛巳)년이므로 25년 전이다. 아버님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양으로 출발하였으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 도착해보니 발인제(發靷祭)가 끝나가고 있었다.
“아이고, 이 사람아 어쩌자고 이제 왔는가.”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나를 붙잡으며 통곡했다. 흐느끼는 사람을 뒤로 하고 상여는 장지(葬地)로 향했다. 출상(出喪) 때 날은 맑았다. 봄이었다. 북악산 기슭의 삼청동에도 봄이 완연했다. 세상은 생명력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바라보는 모든 곳에서 갖가지 색깔과 약동하는 기운이 섞여 춤을 추었다. 눈이 부셨다. 사방은 봄이었다. 하늘을 찢어내던 새파란 곡성과 선소리꾼의 놋쇠 종소리. 금방이라도 너울너울 날아갈 것 같던 만장(輓章). 서럽고 서럽던 평토제(平土祭). 모든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뼈에 새겨진 것처럼 기억은 선명하다. 그러나 기억이 분명한 것과는 반대로 한양에 도착한 이후로 내내 의식은 희미했다. 집에 당도하여 천판(天板)이 덮인 관을 보고 나서도, 아버님의 죽음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기력이 쇠하여 헐떡였다. 사지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떠도 정신은 몽롱했고 아득할 뿐이었다. 곡소리를 내야 할 목구멍에선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새어나왔고 굽은 등허리엔 식은땀이 흘렀다. 초여름 같은 날이 이어졌다. 무덥고 바람이 불지 않아 대기는 녹진녹진하고 무거웠다. 입을 벌리면 곧 입천장이 마르고 숨이 턱 막혔다.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울 수 없었고 울어지지 않았다. 나 자신의 무게로 백치처럼 휘청거리고 있는 동안 장례는 끝이 났다. 문상객들이 떠나고 집 안팎이 정리되자 큰 형님께서는 나를 따로 불러 아버님의 서신을 전해 주셨다.
“아버님께서 잠시 기운을 회복하셨을 때 남기신 것이다.”
형님은 숨을 고르며 슬픔을 가누려 했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들어 보였다.
“임종하실 때 두자미(杜子美)를 읊으셨다. 한 조각 꽃이 져도 봄빛은 줄어드는 것을. 바람 불어 만 조각 점점이 흩어지니 시름 어이 견디리(一片花飛減却春 風標萬點正愁人). 인생 칠십은 자고로 드물다 하였으니 나도 그렇구나. …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다.”
차마 서찰을 곧바로 열어볼 수는 없었다. 한참 동안 주저하고 망설인 끝에 마음을 가다듬고 자세를 정갈히 하여 펼쳐 보았다.

‘성재(聖才) 보아라. 늙은 애비는 병환이 깊어 가는데 너는 천리 밖에 있구나. 이날 이때껏 후회 없이 살았건만 너를 생각하면 슬픔을 금할 길이 없느니,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나 병환이 이미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구나. 이대로 혼절이라도 하여 네게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한다면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아 몇 자 적으니 너는 평생 동안 이 애비처럼 여기고 새겨 듣거라. 앞으로는 누구도 원망치 말고 네 학문에 힘쓰거라. 젊은 나이에 그리된 네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느니라. 그러나 어찌하겠느냐. 한을 품고 죽은 자의 피는 천년이 지나도 푸르다고 했느니. 이젠 몸을 추스르고 주변을 돌아 보거라. 천지가 넓으니 네 한 몸 의지할 곳이 없겠느냐. 심지를 굳건히 지녀야 한다. 가슴에 울분이 쌓이면 더욱 병이 깊어지니 부디 인내할지어다. 오죽하면 사람의 한평생 삶을 생애(生涯)라고 하겠느냐. 애(涯)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더냐. 물(水)변에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합쳐진 것이니 뉘라서 위태롭지 않겠느냐. 모두가 그렇게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떨쳐낼 수 없는 짐 하나는 메고 있는 것이니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자중할지어다. 산목숨은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이 생명이더라. 네 비록 처지는 안타까우나 곤어(鯤魚)와 대붕(大鵬)의 재주를 지녔으니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뜻을 얻으리. 동중서(董仲舒)는 학문에 힘써 삼 년 동안이나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느니라. 교신(蛟蜃)이란 호는 길하지 않다. 끝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라니 너는 어찌 자신을 그리 함부로 여기느냐. 애비가 거듭 당부하건대 항상 정신을 맑게 하고 지나간 일을 되새기지 말거라. 아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이 시름을 어이할꼬.’

나를 감싸고 있던 절망이 깨어지면서 나는 통곡하였다. 아버님의 부재(不在)가, 다시는 그 인자하신 모습을 뵐 수 없다는 고통과 공포가 절망을 압도해 왔다. 이 생에서는 단 한 번도 더 이상 뵐 수 없는 것이다.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죽음의 절대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과연 얼마나 많이 절대로 결과를 바꿀 수 없는 일을 경험하겠는가. 실수는 용서받으며 떠나는 자들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인생은 안정을 기반으로 하는 반복의 연속이다. 그래서 병과 죽음처럼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대개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공양해도 부족하다 할 터인데 나는 실의에 빠져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방황했다. 약관의 아들이 졸지에 반불구가 되어 버린 것만으로도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를 저질렀으니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헤아려 보지 못했다. 서신은 중간 중간 먹이 번져 글자가 뭉개져 있었다. 푸르스름하게 먹향이 배어났다. 천붕(天崩). 글자 그대로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고통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하다고 하여 아버지 여읜 상복을 ‘참(斬)’이라 부르지 않는가. 그러나 어떻게 그 처절함을 감히 표현할 수 있으랴. 지금은 어디쯤 가고 계실꼬. 태산 같은 은혜를 한 줌 흙만큼도 갚지 못했는데 무엇이 급하다고 그리 서둘러 가셨습니까.

새로 생긴 무덤 위의 풀들은 시리도록 푸른색이라 눈이 아렸다. 그것의 푸름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이었고 통(慟)자를 무겁게 이고 있었다. 그해 봄은 길고 잔인했다. 흐름을 이어주던 큰 물줄기가 끊겼는데 이에 기대던 작은 지류가 어찌 흐를 수 있으며 지탱해주던 줄기가 부러졌는데 뭇 잎들이 어찌 홀로 푸를 수 있겠는가. 괴로움과 외로움이 한 몸이라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시묘(侍墓)살이를 하며 글을 보았다. 시경(詩經)과 역경(易經)을 자주 읽었다. 정세에는 귀를 덮어 버린 지 오래였고, 여막 밖의 사람들은 시경의 백성들처럼 아득했다. 서러움이 공기 속에 흔들흔들 떠다녀서 숨을 쉴 때마다 슬픔이 폐부에 다닥다닥 붙었다. 아침 저녁으로 곡을 할 때마다 이를 털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조금 숨통이 틔이면 그 힘으로 하루 하루를 살았다. 등허리가 몹시 쑤시면 사람을 불러 책을 읽게 했고 잡념과 고통이 참기 힘들어지면 뜰로 나와 서성이며 정처 없는 구름을 보았다. 이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학문에만 뜻을 두고 산 세월이었다. 내가 그림자와 같아서 이따금 나이를 잊는다. 가물가물하여 손으로 꼽아보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니 나는 무엇을 살았던가.

삼 년이 지나고 아버님은 담양으로 돌아가셔서 선산에 묻히셨다. 어린아이가 삼 년이 지나면 부모의 품을 떠난다 하여 삼 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법이라 하지만, 어찌 은혜를 받음이 삼 년에 그치겠는가. 나도 아버님을 따라 내려갔다. 예전에 기거하던 집에 와서 아버님의 글씨를 보았을 때, 가슴이 미어져 마치 그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벽에서 내려 조용히 어루만지니 생전의 준엄하신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담양에 내려가고 이 년 만이던가. 아버님께서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 짐을 지고 온 사람이 일을 마치고 돌아간 후에도 아버님께서는 한참 동안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댓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방 안으로 가득 밀려들어왔다.
“그래, 공부는 늘었느냐?”
“더디긴 하나 조금씩 늘고 있사옵니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 하였으니 꾸준히 노력하거라. 일전에 네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소자 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짧지 않으니 여러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짧은 생각으로는 재주가 있고 기개가 뛰어남에도 쓰이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해마다 가슴에 울결(鬱結)만 더하는 자의 수심이 가장 클 줄 아옵니다. 미천한 신분으로 분수를 넘는 재주도 애석하긴 하나 그들은 애초에 벼슬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옵니다. 글을 배우고 성군을 보필하여 세상을 경영할 만한 자질이 있는데도 세상이 어지러워 쓰이지 못하고 마는 자의 심정에 비할 바가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내가 처음 담양으로 내려왔을 때 한양에서 혼인한 남녀 노비를 데리고 왔다. 계집종은 산달이 가까웠는데 담양에 오고 곧 아들을 낳았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글을 읽고 있으면 놀다가도 귀를 기울이며 방 안을 들여다보고 곧잘 흉내를 내니 어미가 민망하여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오고 가며 눈여겨보니 아이가 자못 총명하였다. 골격도 제법 있어서 재주가 아까웠다. 아이를 보며 아버님이 하신 말씀을 자주 생각했다. 네가 가여운 것이냐, 내가 가여운 것이냐. 내 네가 살아갈 삶을 알지 못하나, 그래도 내가 더욱 딱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늘이 나를 낸 까닭은 오직 그 위엄을 떨치기 위함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저를 보며 생각에 잠기자 어린 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웃었다.
말을 마치고도 말씀이 없으시니 조바심이 났다. 아버님께서는 천천히 벼루에 먹을 갈으셨다. 한 식경쯤 지났을까. 곱게 갈린 먹은 은은한 향기를 뿜어냈다. 일필휘지로 써주신 글은 적벽부(赤壁賦)의 한 구절이었다. 호방하고 웅대한 기세는 거침없었다.

‘물과 달이 가는 것은 이와 같으나 일찍이 사라지지 않으며, 차고 기우는 것은 저와 같으나 끝내 소멸하지도 자라지도 않는다. 무릇 변하는 것으로부터 보면 천지는 한순간도 변하지 않은 적이 없고, 변하지 않는 것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겠는가(逝者如斯 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而又何羨乎).’

그것이 다였다. 아버님은 과묵하신 분이셨다. 허나 말씀에 항상 온기가 있었으니 우보천리(牛步千里)의 가르침은 가슴에 묵직하고 따뜻하게 얹혔고, 써주신 글씨에서도 아버님의 은애를 느낄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어도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아버님께 글을 배우던 때를 떠올렸다. 여섯 살 때였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번지가 인에 관해 묻자 공자께서 말하시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시고, 앎에 관해 묻자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다(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살아가면서 항상 마음에 깊이 새기거라. 이를 모르면 글을 수천 권을 읽어도 배웠다 할 수 없으니 반드시 유념하거라.”
이 구절을 진실로 이해하게 된 것은 담양에 내려와 사서삼경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역사 속의 많은 인물들이 시대와 불화하여 떠돌거나 숨어 살았다. 이에 그치지 않은 자들은 박해받고 모함으로 오명 속에 죽었다. 백성들은 고생이 끊일 날이 없으니 죽어서야 손발을 편히 둔다. 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남에게 덜어 줄 수 없는 자신만의 근심과 말 못할 사연을 지니고 있으니 이를 아는 것이 곧 세상의 큰 이치를 아는 것이었다. 아버님의 근심거리가 나라고 생각하니 심사가 몹시 괴로웠다. 마음 한 켠에선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얼른 맹자(孟子)를 외웠다. 낮에 외우던 부분도 생각나지 않았다. 감은 눈을 비집고 몇 방울이 흘렀다. 뺨은 곧 싸늘해졌고 마음도 얼어붙었다. 달이 밝아서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버님과 선산에 올랐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무덤부터 몇 년 전에 새로 생긴 할아버님의 무덤까지, 많은 무덤들은 손질되어 가지런했다. 양지바른 곳이라 햇볕은 아늑했고 평화로움이 무덤마다 내려앉았다. 산 중턱에서 아버님은 멈춰 서셨다. 자리는 닦였으나 봉분은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땅도 순조로운 지기(地氣)로 사람을 품어 안을 것이다.
“여기가 내가 누울 자리로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꼬. 두터운 안개가 마음에 드리워졌다. 아버님께서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보셨으나 시선은 어디에도 걸려있지 않았다. 무엇을 보고 계시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버님의 뒷모습이 낯설었다. 나는 아버님의 뒷모습에 익숙했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불안했다. 기상이 남다르신 분이셨으나 어느덧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아 기력이 쇠하신 듯 했다. 한 치도 흐트러짐은 없었으나 곳곳에서 아버님께서 살아오신 육십여 년의 세월은 어김없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어버이의 나이 드신 모습을 처음으로 알아차리는 순간은 참담했다. 그것은 난감함과 죄스러움 그리고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한 일종의 분노였다.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그저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른 풀들이 바람에 쓸렸다. 내려오는 길에는 논어를 외워 간신히 추태는 면할 수 있었다. 가슴이 허했다.
집에 오니 아버님을 모셔갈 사람이 와 있었다. 마루를 내려서시는 모습을 보니 가슴 속의 구멍이 더욱 커졌다. 아버님은 돌아보지 않고 떠나셨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뵌 모습이었다.

젊은 날 하늘을 원망하며 스스로를 망쳤다. 그러나 늙으니 평생 얻으려 했던 평정이 절로 찾아들었다. 집착과 구속됨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슬픔과 기쁨이 단지 순간임을, 곧 지나가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우주 만물의 변함과 변하지 않음과 같은 것을 깨닫는 것이 노년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기엔 결코 이를 알 수 없으니 이것이 인생의 오묘함이 아니겠는가. 소동파(蘇東坡)가 적벽에서 객과 함께 노닐 제, 퉁소 불던 손이 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장강의 무궁함을 부러워했다. 이에 소동파는 천지는 순간마다 변하고, 또 변하지 않음을 달과 물을 빌려 말하니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흥에 취해 날이 밝는 줄도 몰랐더라. 아버님께서 일찍이 내게 말하려 하신 것도 바로 이런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천지는 장대하고 무한한데 인간은 죽으면 혼백은 흩어지고 살은 삭아 스러져 무(無)로 돌아가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대대로 벼슬하는 세경(世卿)이나 이름 없이 한 세상 살다가는 천출이나, 멸함을 피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임을 그래서 모두가 서럽고 섧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려 한 것이다. 누가 더욱 고통스러운지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좌절과 애끓는 괴로움은 필연적이니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아버님께서는 또한 우둔한 자식이 하염없이 무상감에만 젖어들 것을 염려하셔서 초서로 단숨에 써주셨으니, 글씨는 변화무쌍하게 생동하여 기백이 시원하니 호연지기의 풍모가 느껴진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하늘을 가르는 산을 병풍으로 하고 도도한 장강의 물결에 잔을 씻어 둥근 달을 담아 마시는 옛 사람의 정취가 가슴에 가득 들어찬다. 천하는 넓고 넓으니 한을 지닌 자가 너 하나뿐이겠느냐. 훌훌 떨치고 일어나 주인 없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즐기는 것이 어떠하냐. 일없이 한가하게 산수의 운치를 구경하는 것도 복이니라. 아버님의 육성이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아 하 반갑고 애틋하여 늙은 눈에 물기가 어린다.
한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했고, 또 한때는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가를 물었다. 가볍디 가벼운 삶에 단 하나의 의미라도 부여하기 위해 자조(自嘲)를 누르고 애를 썼다. 지금은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경치를 즐기기를 하루 종일해도 부족하다. 책과 잘 빚은 술이 있고, 사시사철 희롱하고 품을 수 있는 대나무와 물이 지천이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봄이면 막 돋아나는 새순의 연두빛이 가랑비에 젖어 투명하게 빛나고, 여름이면 화창한 하늘은 더욱 가까워 초록의 땅과 어우러져 볼 만하고 더위가 짙어지면 소낙비 내려 땀을 식혀준다. 가을은 거두어 들이는 계절이라 집집마다 인심이 훈훈하니 풍경은 더욱 풍성하더라. 겨울에 흰 눈은 또한 장관이니 눈 위에 달빛이 비치는 것을 구경하느라 긴 밤 긴 줄 모른다. 절경이 이처럼 가까이 있으니 만족함이 차고 넘친다. 이제 옛 일을 돌아보니 웃음이 난다. 참으로 멀리 돌아왔도다. 아름다운 세상을 살았다.
신사(辛巳)년 시월 초삼일 담양에서 순천(順天)은 쓴다.

* 이 글에서 당저 병진년은 숙종 2년인 1676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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