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승원 - 소설부문 가작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약국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그리고 한참 올라오면 왼쪽으로 오락실이 두 개 보이거든? 가까운 쪽 오락실을 끼고 오르막길로 올라오면 돼. 족히 10분 정도…… 아니, 아니……. 첫 번째 오락실이지. 이름이 아마 골드 오락실인가 그럴 거야. 그런데…… 혼자 와도 괜찮겠어? 내가 마중을 나가야 되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말이지. 정말 미안하게 됐다.
수화기 저편에서 전전긍긍하는 선배의 모습이 느껴졌다. 공부방 일은 죽어도 싫다는 나를 한 달만에 겨우 설득시켰는데 내가 번복이나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날 하늘은 비까지 뿌렸다. 봄비 치고는 과한 양이었다. 선배가 말한 정류장에 내렸을 때는 빗발이 싸리비처럼 도로를 쓸고 있었다. 우산을 뚫어낼 듯 후드득거리는 소리에 잠시 얼이 빠진 채로 서 있었다. 지하철역을 끼고 있는 동네인 탓인지 주변에 높은 건물이 빼곡했다. 목 좋은 곳에 신장개업한 가게 앞에는 좌우로 몸을 비꽈대는 기다란 풍선인형들과 호객행위를 하는 미녀 두 명도 보였다. 줄기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느려진 차량의 행렬 속에서 끊임없이 경적이 울리기도 했다. 동네는 번화가라 할 만했다. 선배가 말한 약국을 지나 걸어가는 중간에도 무언가 바쁜 듯 종종걸음을 치는 성장(盛裝)한 사람들이 즐비했다. 없을 게 없는 시끌벅적한 상가 옆을 지나가며 이런 번화가에도 공부방이 운영되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의아해하던 차에 골드 오락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젠 오르막만 남았구나, 하며 오락실을 끼고 돌아섰을 때 잠시 멈칫했다. 눈앞의 급경사에 압도당했달까. 차 한 대나 겨우 지날 수 있을 좁은 길이 쏟아져 내릴 듯이 버티고 있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장대비가 우악스레 빨고 있는 그 길의 끝은 빗줄기 사이로 뿌옜다. 길 양 옆의 하수구는 넘친 빗물을 힘겨워하며 세찬 물줄기를 뱉어냈다. 그 위로 개나리꽃잎도 진달래꽃잎도 둥둥 떠내려 오고 있었다. 단단히 각오를 했지만 언덕은 가팔랐다. 숨이 찬 나머지 세 번에 나눠 올랐다.
그렇게 ‘족히’ 10분을 오르니 비로소 평지 비슷한 터가 나왔다. 그새 주춤해지긴 했지만 줄기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까무잡잡한 아이들 몇몇은 우산도 없이 뛰어놀고 있었다. 공부방 사무실을 물으려 아이들 쪽을 향해 저기 얘들아, 했더니 까만 눈동자들이 일제히 내 쪽을 향한다. 공부방 사무실이 어디니? 깜빡깜빡. 흠뻑 젖은 머리의 까만 두 눈들이 깜빡거렸다. 나, 새로 온 선생님인데…… 공부방 사무실이 어디니? 다시 한 번 묻자, 아이 두엇이 팔만 쭉 펴서 한 건물을 가리킨다.
건물을 찾자 비로소 한숨이 돌려졌다. 조금전 지나쳤던 번화가 쪽을 내려보았다.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 사이로 이제 막 켜지는 네온사인들이 현란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 길게 늘어선 수많은 자동차 불빛이 장관을 이뤘다. 섬인가? 잠시 생각했다. 화려한 유채(有彩)의 번화가 속에 높게 떠있는 무채(無彩)의 섬이 아닌가. 무언가를 재촉하듯 방정맞게 깜빡이는 네온사인 바다 한가운데 솟은 B동, 달동네의 시간이 안개에 쌓인 채로 아이들과 함께 느리게 가는 듯했다.
사무실 안에 선배는 없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성호 오빠 후배 진이연이라고 하는데요. 이름을 대자 사무장쯤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나를 반겼다. 비도 오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는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내어 왔다. 선배가 올 때까지 기다릴 요량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데 창 밖으로 동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에 보이는 축대 위로 피같이 붉은 흙물이 흐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시멘트 땜질 자국이 흉한 축대가 힘겨워 보였다. 몇몇 집은 외벽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동네가 좀 엉망이죠? 도착한 후부터 줄곧 바깥만 바라보는 내게 사무장이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수리할 생각을 안 해요. 저렇게 무너지나 불도저에 무너지나 내 마찬가지란 생각이죠.
난데없는 불도저란 말에 영문을 몰라 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사무장은 몇 마디를 덧붙였다. 당장은 아니지만 재개발 계획 때문에 언젠가는 동네가 철거된다는 것과 그 탓에 동네가 점점 흉물스러워지고 있다는 것. 살던 터전을 잃게 될 판이니, 철거에 대해서는 동네 주민 모두가 반대의 입장이라 했다. 하지만 그들도 은근히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느낀 탓인지 어려운 형편에 자기 돈을 써가며 수리하려 들지를 않는다고 했다.
성호씨가 철거촌이란 얘길 안 했나봐요? 어렵게 나를 설득하던 터라 철거촌이란 안 좋은 인상을 숨긴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이, 가로등에 가물가물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의 가로등이 켜지자 주위는 약간 밝아졌다. 하지만 불빛을 받은 구석구석이 드러나는 것이 묘하게도 동네의 환부를 들춰 본 느낌이 들게 했다. 그제야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이럴 바에야 차라리 어둠에 덥힌 깜깜한 상태가 더 낫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가르치는 일 외에 행정이나 사무와 관련된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못을 박아 두었다. 그래서인지 주말에 고작 몇 시간을 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만 하는 것은 그리 고되지 않았다. 종종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칭얼대는 아이가 있긴 했지만 그런 것에도 곧 익숙해졌다. 내가 익숙해진 만큼 아이들도 나를 익숙해했다. 4월 초의 서로에 대한 경계심은 충분히 풀어져서 점점 공부방 일이 편해졌다.
하지만 B동 초입 오르막에는 익숙해질 수 없었다. 오히려 오를수록 가팔랐다. 축대 위의 흙은 나날이 줄어갔고 위태해 보이던 외벽과 담이 무너져 내린 일도 몇 번 있었다. 그럼에도 B동은 날이 갈수록 마치 휴식처인 양 느껴졌다. 수업이 끝나면 어김없이 걸어 내려오던 가파른 길. 그 길을 위태롭게 내려오고 있자면 그간 낯을 익힌 어르신들이 수고하셨다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명색이 나도 선생이라고 자식뻘이나 되는 나에게 예를 갖춘 인사였다. 그때마다 고꾸라질 것처럼 걷던 걸음을 멈추고 필요 이상으로 굽실거려야 했다.
하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내 얼굴에도 한가득 진심어린 상냥함이 묻어 나왔다. 이런 인사를 나눈 것이 얼마만인가. 적어도 그곳은 이웃끼리 눈인사마저 생략할 만큼 각박하지 않았다. 먹고 살기가 힘들기에 더 아득바득 해야 하건만, 멈출 듯 말 듯 한없이 느리고 정겹게 살던 그들의 모습. 허름한 환경 속에서 그런 모습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우리 동네 그리기’란 것이 있다. 공부방에서 가르치는 고리타분한 레퍼토리 중에 한 가지다. 동네의 아이들을 모아다가 큰 전지를 이어 붙여서 살고 있는 동네를 협동화로 그리게 한 다음, 다시 여러 장으로 잘라내어 쪽매 맞추기를 시킨다. 여럿이 힘을 모아 동네를 그리고 다시 조각을 맞추는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동네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주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토록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운 동네에 누가 정을 붙이겠냐마는 우리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참 동안 방법을 설명했다.
동네 그리기를 처음 시켜보는 입장에서, 종이에 단순히 자신의 동네를 그리는 것만으로 과연 무슨 효과가 있을까, 당시에는 상당히 의문스러웠다. 그날 따라 아이들은 왜 그렇게 산만한지, 평소 말썽만 일으키던 초등학생 하나가 크레파스통을 뒤집어 엎고는 동생과 싸움까지 벌이는 바람에 내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졌을 즈음이었다.
잠깐 가게에 다녀오마고 나갔던 선배가 교실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동윤이는 왜 밖에서 저러고 있는 거냐? 동윤이가 왜요? 세탁소 앞에서 풀이 죽어 쭈그리고 앉아있던데? 자식……. 불렀는데 대답도 않고……. 그러고 보니 동윤이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도 잘 그린다는 칭찬 한 마디에 으쓱해하던 녀석이 웬일인가 싶어 교실 안을 선배에게 맡긴 뒤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선배가 말한 상가 쪽으로 나가자 세탁소 앞에 동윤이가 앉아 있었다. 행여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터지지 않았을까 걱정을 하고 있던 터라 동윤이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야! 동윤! 거기서 뭐하는 거야? ……. 큰소리로 불렀건만 동윤이는 나를 본 체 만 체 땅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부르는 걸 못 들었나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보니 왼손에 들려진 낯익은 종이 한 장. 바로 동네를 그린 후 조각을 내어 나눠준 종이였다.
이 녀석……. 이러면 다른 아이들이 너 때문에 작품을 완성할 수 없잖니. 아이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평소 교사 교육을 받던 대로 차분히 말했다. 동윤이가 고개를 들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서 세탁소 간판 불빛에 비춰진 얼굴을 슬며시 살피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가슴팍에 안겨온다. 선생님……. 영문도 모른 채 동윤이의 등을 두드리며 진정을 시켰다. 우리 집이…… 우리 집이 잘렸어요. 그날 밤 동윤이가 마음이 상해서 사라졌던 이유였다. 쪽매를 맞추자며 종이를 자르던 차에 동윤이의 집이 있는 부분이 둘로 나뉘어 버린 것이다. 아이는 그 순간부터 기분이 가라앉았고 잠시 후 교실을 나가 땅거미가 질 때까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어린 마음에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아무 말도 없는 동윤이를 어차피 단순한 그림 그리기가 아니냐며 반 시간 동안 달랬다. 하지만 그 ‘단순한’ 그림 그리기에 이토록 영향을 받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나는 ‘우리 동네 그리기’가 공부방 프로그램의 핵심이라 주장하는 철저한 신봉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동윤이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집이 잘렸다던 아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끊임없이 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유난스레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동윤이 어머님이었다. 집에 돌아온 아이가 도통 말이 없다고 하시면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고 했다.
저녁에 있었던 얘기를 했다. 그랬었군요. 곧이어 어머님의 긴 말씀이 이어졌다. 동윤이 아버님의 사업이 어려워져서 몇 달에 한 번씩 쫓겨나듯이 했던 이사. 족히 열 번은 넘을 거라고. 친구가 생길 만하면 이사를 다니니, 아이는 이사라면 학을 뗀다고 했다. 그래도 B동으로 와서는 1년을 넘게 버티고 있다고. 그나저나, 동네가 곧 철거돼서 걱정이에요. 동윤이한테 또 어떻게 설명하나 싶고……. 집안 형편이 아이를 저렇게 만든 건 아닌가도 싶고…….
잘린 집을 본 동윤이의 심정이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B동이 그렇게 편하게 느껴졌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H동……. 태어나서 20년 가까이 살았던 나의 고향. ‘고향’이라면 떠오르기 마련일 평화로운 전원의 풍경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나의 소중한 추억이 묻어있는 곳. 그곳의 분위기를 나는 B동 곳곳에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H동은, 하지만 지금 없다. 철거촌 사람들의 아픔을 가까이 지켜본 사람으로서 나의 아픔이 그들의 아픔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H동이 헐린 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간혹 안타까운 꿈의 배경으로 옛집이 어른거리는걸 보면 그 집은 분명 누군가에게 빼앗기듯 철거된 것이 아닐까 간혹 생각한다.
그곳은 산을 끼고 자리 잡아서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앓았다. 봄이면 코끝이 아찔할 정도의 꽃향기와 꽃철이 가면 내리는 꽃눈(落花)이 인상적이었고, 여름이면 내 살갗마저 푸르게 물들일 기세로 온 동네가 청록의 옷을 갈아입었다. 가을의 은행, 단풍과 겨울의 설경도 유명해서 계절의 길목에 들어선 날씨 좋은 저녁이면 동네를 구경하러 온 산책 손님들로 붐비기 일쑤였다.
집 앞의 마당도 아름다웠다. 마당이라 부르기도 초라한 공간에 부모님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주변에서 얻어온 꽃나무를 심었다. 웬만한 정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즐비한 꽃나무 사이로 지나다니기는 힘들었지만 보기에는 좋아서, 현관문을 연 채로 밖을 바라보는 것이 어린 내게는 꽤나 즐거운 소일거리였다. 열매가 열리는 나무들도 많았다. 그 중에서 감나무의 감은 특히 먹을 만했다. 시장에서나 보던 길고 뾰족한 장시(長枾)였는데 봄에 잘 솎아만 주면 땅딸한 나무에서도 주먹만 한 감이 예닐곱 개씩 열렸다. 가는 가지가 찢어질 듯 위태롭도록 자란 감이 잘 익기를 기다렸다가 따먹는 맛이 그만이었다.
어느 해인가도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감을 따러 마당에 나갔다. 감나무 밑에 무언가가 있어서 다가가보니 예쁘장한 고양이 한 마리였다. 그냥 동네 도둑고양이겠지 하고는 기척을 내면 알아서 도망가리라 생각했는데 이 고양이, 내가 다가가도 한 번 힐끗 쳐다만 볼 뿐 사람 무서워 할 줄을 몰랐다. 노란 눈으로 얼마간을 쳐다보더니 뭐가 대수냐는 듯 슬쩍 눈을 감고 자던 잠을 도로 청했다. 좀 건방져 보였지만 어딘가 지쳐 보이는 것이 불쌍해서 도시락으로 먹다 남긴 고등어 한 점을 으깨서 가져다주었다.
분명 주변에서 사람 손 타던 고양이일 게여. 그 날 이후, 때만 되면 꼬박꼬박 우리 집 앞을 서성이다가 음식 찌꺼기를 받아먹던 고양이를 옆집 아주머니는 주인 잃은 고양이가 아니겠냐고 했다. 실제로 그 고양이는 다른 길고양이와는 다르게 사람을 잘 따랐다. 아무리 멀리 있다가도 밥그릇을 두드리면 야옹거리면서 마당으로 달려왔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가면 강아지처럼 뒤를 졸졸 쫓아왔고 그 모습이 귀여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꼭 과자 한 봉지를 사다가 대여섯 걸음에 한 개씩 던져주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에 선거가 있었다. 늦어도 5~6년 안에 재건축을 시작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후보가 지역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아직 그리 낡지 않은 동네라 재건축은 좀 무리가 아니겠냐는 주변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재건축과 관련된 일은 예상 외로 급물살을 탔다. 재건축조합이 결성되고, 조합장이 선출되고, 동네 한쪽 공터에 조합 사무실 구실로 가건물이 들어서는 데는 불과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이듬해 1월, 조합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무슨 축제처럼 동네가 술렁였던 것도 잠시, 재건축의 건설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네 개의 파로 나눠졌다. 이들은 의견 차이로 종종 크게 다퉜다. 서로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은 채, 어떤 건설업체 측에서 몇몇 조합원들을 매수하여 자신들을 지지하게 했다는, 매수하는데 든 돈이 어마어마해서 그 조합원들은 앉아서 돈벼락을 맞았다는, 간밤에 어떤 건설업체 직원과 조합장 김씨가 구청 앞 술집에서 함께 술 마시는 것을 봤다는, 연신 헤헤거리는 직원의 낯짝이 재수가 없었다는, 조합장을 잘못 뽑은 것이 아니냐는 그런 말들만 돌았다. 그 해 가을과 겨울의 동네는 계절을 앓기 전에 이미 그렇게 심한 소문을 앓고 있었다.
이듬해 봄, 조합이 들어선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 조합원들은 투표로 건설업체를 결정했다. 선정된 건설업체에서 동네 곳곳에 뽑아주셔서 감사하다며 아름다운 동네를 만들겠다고 펼침막을 거는 사이, 동네는 다시 여러 번의 싸움과 질펀한 소문으로 물들어 버렸다. 보상 기준이 불만인 일부 주민들이 투표 결과에 불만을 품은 몇몇 조합원들에 합세해 재투표를 요구했다. 부정하게 치러진 투표의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1년 넘게 겪어온 대립과 마찰에 지친 듯했다. 거 좀 손해 보는 건 아깝지만서도, 참말로 친하게들 지냈었는데 1년 만에 이게 무슨 난리랍니까. 이 꼴을 더 이상 어떻게 두고 보라고……. 동네 노인들은 동네에 돈귀신이 붙었다고도 했다. 과연 그해 가을, 재건축에 대한 모든 행정적인 절차가 강경조로 마무리되었을 때, 조합장 김씨의 눈에는 붉은 돈귀신이 붙은 것 같았다. 등하교길에 김씨와 마주쳐도 눈치만 살폈을 뿐, 말수가 부쩍 줄어든 묘한 눈빛의 그를 아는 척 하는 것이 내키질 않았다.
행정적인 절차가 마무리되고 착공일이 정해지자 곧이어 주민들의 퇴거가 시작되었다. 퇴거 기한은 연말까지. 이왕이면 빨리 이사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며 몇 집이 서둘러 동네를 떠났다. 옆 동네에 세를 얻었으니 재건축이 끝나거든 다시 보자는 사람도 있었고, 집을 팔고 아예 이사를 가는 것이 마냥 아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재건축에 ‘결사반대’를 하는 사람들은 인사를 나눌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한 집, 두 집 동네를 떠나자 동네는 당장이라도 재건축이 될 것처럼 썰렁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자고 일어나니 이미 이사를 간 옆집 대문에 시뻘건 페인트로 ‘퇴거’라 씌어져 있었다. 채 마르기 전에 흘러내린 뻘건 글자가 가뜩이나 휑해진 동네 분위기를 묘하게 돋우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크고 점잖은 작자들 몇몇의 소행이라 했다. 그들이 밤마다 나타나서 각목을 들고 이미 비운 집의 남아있는 집기를 부수며 다닌다는 것이었다. 옆집 대문의 글씨도 그들의 작품인 모양이었다. 조합장 김씨의 발 빠른 처신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한 집이라도 빨리 퇴거시켜보자는 속셈이라고 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집에서는 나에 게 통금시간을 정했고, 당연히 고양이와 매일같이 가던 밤 산책도 금지됐다. 고양이는 쏠쏠했던 야식이 못내 아쉬웠는지 밤마다 마당을 찾아와 야옹거리다 지쳐 가버리곤 했다. 굳이 통금시간이 아니더라도 워낙 안 좋은 소문이 돌던 때라 어둑하게 땅거미가 진 후에는 문 밖을 나서기가 무서워졌다.

그 무렵 서울은 너구리의 출현으로 떠들썩했다. 뉴스에서는 친환경적인 정책이 수 년 만에 야생동물의 정착을 도왔다며 구청과 시청의 환경정책 관계자들을 인터뷰했다. 먼 거리에서 잡힌 화면에도 반짝거리는 너구리의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시커멓고 둔해 보이는 놈들 중에 몇몇이 놀란 듯 카메라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뉴스의 말미에 한 대학의 동물학자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높지 않아 가까이 가서 먹이를 줘도 도망가지 않지만, 자칫 물릴 경우 광견병에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고 했다.
텔레비전 속 그 너구리는 우리 동네에도 나타났다. 하루는 저녁 심부름으로 구멍가게를 다녀오는 길에 마당에 들어섰다가 구석에서 움직이는 시커먼 물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행여 검은 양복의 아저씨들이 나타날까 봐 잔뜩 긴장을 했다가, 마당에 들어서며 막 긴장이 풀리던 순간이라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살펴보고는 뉴스에서 본 너구리라는 것을 알았다. 놈은 고양이가 남긴 저녁을 게걸스레 먹고 있었다. 뉴스에 찍힌 딱 그 모습이었다.
아무리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높지 않다고 해도 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제 덩치를 믿는 탓인지 나의 등장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게걸스럽게 먹기만 했다. 나 또한 너구리를 실제로 처음 보는지라 신기한 마음에 쫓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한참을 보고만 있었다. 놈은 그릇 핥는 소리까지 내며 모두 먹어치웠다. 더 줄 것을 찾으러 얼른 집에 들어갔다가 냉장고 속의 햄을 찾아냈다. 잘라줘도, 잘라줘도 만족할 줄 모르던 놈은 햄 한 줄이 몽당해질 때까지 먹어 놓고는 그래도 뭔가가 아쉬운 듯 내 쪽을 힐끔대다가 사라졌다.
이튿날도 놈은 나타났다. 이번엔 뒤에 새끼로 보이는 덩치 작은 두 놈이 더 있었다. 세 마리의 식성은 더 놀라웠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쩝쩝거리던 놈들은 어느새 그릇을 비워버렸다. 그걸 보고 있다가 비로소 고양이에 생각이 미쳤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고양이는 하루 종일 밥그릇 주위에서 킁킁거리기만 했을 뿐, 밥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그러던 녀석이 저녁에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고양이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는 놈들이 서성대다가 그냥 돌아가버릴 때까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너구리의 출현이 뜸해진 어느 날, 저녁 밥상에 고등어가 올라왔다. 밥을 후다닥 먹고는 고등어 머리를 떼서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간만에 생선을 먹게 될 고양이를 생각하니 도리어 내가 들떠서 신나게 밥그릇을 두들겼다. 하지만 엉뚱한 너구리 가족들만 불러냈을 뿐, 반 시간이 넘도록 그릇을 두들겨대도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점심을 주지 않아 배가 고파서라도 나타날 녀석이 끼니 때를 넘겨서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한참을 걱정하다가 그만 시무룩해져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밤늦게, 쌀이 떨어졌다며 내일 아침치만 좀 꾸어달라고 옆집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언덕 아래 이씨네가 오늘 이사를 갔다는 얘기 끝에 나온 말에 쏟아지던 졸음이 가시며 온 신경이 현관 쪽으로 향해버렸다. 그나저나 이 집 고양이 무사해? 새벽 내내 뭐한테 시달리는지 기분 나쁜 울음소리에 잠을 다 설쳤다니까. 나 죽겠다고 울어대는 게 고양이들 싸움 같지도 않고……. 원, 듣다 듣다 그런 울음소리는……. 혹시 요즘 어슬렁거리는 그 너구리 짓들 아니야?
곧 밖으로 나가서 집 주변을 돌며 애타게 고양이를 불렀다. 그렇게 고양이를 찾다가 지쳐서 집으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 자리에 눕자 베개 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죽겠다는 울음소리만 들었어도 어떻게 해봤을 텐데. 어두운 밤귀가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너구리들의 짓이라 생각하니 놈들에게 먹이를 줘서 마당에 들여 버릇한 것도 한스러웠다.
곧 이사를 가게 되면 고양이 문제가 성가실 판이었는데 차라리 잘 됐지 뭐니. 이튿날, 침대 위에서 꼼짝 않고 끼니까지 거르는 걸 보고 엄마가 하는 말에, 꼭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그러냐고 언성을 높여버렸다. 하지만 그날 이후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이면 매일같이 현관 앞을 확인하는 게 일이 되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커멓게 기분 나쁘던 너구리조차도.

한 달 뒤, 가족은 주변에 아파트를 얻어 정든 집을 떠나 이사를 갔다. 생전 처음 하는 이사로 겪은 낯선 환경 탓인지 얼마간 기분 나쁜 꿈만 꾸었다. 너구리에게 먹이를 주다가 손가락을 물리는 꿈부터 멀쩡한 집에서 자고 있는데 집이 무너지는 꿈까지 갖가지 악몽에 시달렸다. 그렇게 하룻밤에 두세 번씩은 꼭 잠을 깼다. 깰 때마다 얼마간은 낯선 벽지 무늬며 가구 배치에 내가 과연 어디에서 자고 있는지 골똘히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굉장히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아직 H동에 살고 있던 나는 세상 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소름이 돋는 이상한 소리에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밖은 아직 밤이었고 달조차 뜨지 않았지만 손전등 같이 밝은 기운이 창 밖에서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잔뜩 긴장을 하고서 창 밖을 내다본 순간 나는 너무 놀라 뒤로 넘어졌다. 그야말로 집채만 한 너구리 한 마리가 집의 밑동을 갉고 있었다. 그 탓에 집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고 그 흔들림은 마치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사람의 그것 같았다.
뻔한 개꿈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내내 나는 학교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교길에 집에 오다가 반쯤 넋이 나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H동엘 들렀다. 석 달 만에 가보는 동네. 동네 정문의 텅 빈 관리사무소부터 집 앞까지 걷는 동안 수많은 기억이 스쳐갔다. 더 이상 아무도 가꾸지 않아 난잡스러워 보이는 길가의 꽃나무들과 칠이 벗겨진 울타리들이 새삼스러웠다. 석 달이란 공백을 무색케 한 걸음의 망설임도 없이 도착한 집 앞에서 나는 잠시 멍해져 버렸다. 깨진 유리창 뒤에서 꼴사납게 흔들리는 누더기 커튼과 예전의 몇 집에서처럼 시뻘건 페인트로 쓰인 글자들. 사람이 살던 집을 어떻게 저 지경으로 만들 수 있을까 싶었다.
라일락, 돌배나무……. 좀 쓸만한 나무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정원이었는데 그 정원에 감나무 하나만 서있는 것이 그렇게 황량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무는 말라 죽어있었다. 십여 년을 매만져서 만질만질해진 문고리는 정이라도 맞았는지 흉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모든 것이 망가져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집안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짐이 되어 두고 온 가구들이나 살림살이부터 심지어는 화장실의 변기까지 좀 돈이 된다 싶은 것들은 모조리 누군가가 가져가 버린 것 같았다. 마루 위에 찍힌 수많은 낯선 흙 발자국. 그 위로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느낌이 묘했다. 이사하던 날 아침, 등교를 하면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입을 맞췄던 내 방 문을 슬며시 어루만졌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탈진한 사람의 입처럼 모든 찬장의 문이 열려 있었다. 경첩 한 개가 부서져서 힘겹게 걸려 있는 찬장 문을 닫다가 윗칸에 있는 무언가를 봤다. 까치발을 하고 손을 뻗어 꺼내보니 바로 밥그릇. 내 돌상을 차릴 때 샀다는 밥그릇이었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것이라며 엄마는 그걸 20년이 다 되도록 버리지 않고, 생일날 아침이면 미역국 옆에 늘 그 밥그릇을 올렸다.
우연히 찾은 밥그릇을 손에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잊고 간 무언가가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쉬이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방에도 들어가 보고 거실 구석구석도 살펴보고 그렇게 어슬렁거리다가 내가 이재민이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텔레비전에서 본 물난리나 불난리를 겪은 집 잃은 사람처럼 그곳에 앉아 망연자실해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다 문득 이 동네엔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지난밤 꿈 탓에 넋을 잃고 옛집을 찾아 왔다. 하지만 정신이 좀 들자 골목길 몇 개를 돌아 동네 밖으로 벗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 골목길을 돌면 뿌리박힌 채 떠나지 못했던 감나무의 원혼과 마주칠 것 같았다. 그 골목길을 벗어나도 다음 골목길에서 상처투성이 얼굴을 한 고양이와 마주칠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무서운 것은 시커멓게 도사리고 있을 집채만 한 너구리였는지도. 머릿속에 두려움이 가득 찰 무렵 집을 뛰쳐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동네 입구. 큰 도로에서 행인들을 보고는 뜀박질을 멈췄다. 그제야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안심했다.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눈 안으로 들어간 땀방울이 쓰려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것이 단순한 쓰라림이었는지 아니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내 옛집을 확인한 것에 대한 슬픔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흐른 자국을 따라 흐르는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귀가 시간을 넘겨 들어와서는 좀처럼 웃을 줄 모르는 내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엄마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주워온 밥그릇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옛 동네를 찾아갔노라 대답을 했다. 엄마는 기겁을 했다. 그런 곳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고 찾아갔냐며 나를 나무랐다.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두 번 세 번 다그쳐 다시는 그 곳에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그 다그침이 아니었더라도 다시 찾지 않을 것이다. 근본을 알 수 없이 눈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슬픔과 두려움이 싫어서라도 결코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소문에 의하면 3년 후 H동의 재개발은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하유…… 말도 말아. 돈을 꽤 들여 지었는지 집이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다니까. 근데 시어머니가 문제지……. 이사 들어간 첫날부터 앓아누우시더니 도무지 차도가 없으시네. 오래 누워 계시니 노인네라 걱정도 되고. 오랜만에 우리 집을 찾은 옆집 아주머니. 새로 지은 아파트가 꽤나 자연친화적인 데다가 경관도 그만이랬다. 공원에 고운 모래를 깔아서 맨발로 걸을 수도 있다니까. 시종 이어지던 아파트 자랑에 유일한 티는 ‘노인네의 건강’이었다. 젊지 않은 노인네라 새 집에 적응하기가 힘들 거라는 대화가 이어졌다. 워낙 오래 사셨어야지. 걱정이네.
아늑하긴 아늑했는지 그 해 연말, 그곳은 시에서 선정한 올해의 아파트에 뽑혔다. 그리고 그 겨울, 노인네도 아늑한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그 아늑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관심없었다. 오히려 의식적으로 그 주변을 피했다. 간혹 택시를 타도 기사 아저씨가 의문스러워 할 정도로 애써 먼 길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종종 그런 부탁도 귀찮아질 만큼 술에 취한 채로 택시를 타면 어쩔 수 없이 그 옆을 지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연아, 그 동네 끝내 헐렸다. 이틀 전, 성호 선배의 연락을 받았다. 졸업을 한답시고 취업을 한답시고 생활이 바빠졌었다. 그렇게 은근슬쩍 공부방을 떠난 것이 1년 전. 같이 공부방을 꾸려가던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한동안 동네가 잊히지 않아 괴로웠다. 거기서 놀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가족들에게도 미안했다. 애써 외면했었다.
1년이 흐르니 연락도 뜸해졌다. 매사에 미안하던 내 모습도 사라졌다. 그래서 별 망설임 없이 수화기를 잡았는데 뜻밖의 소식을 접한 것이었다.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윤이는요? 친구들은요? 입에 물린 말들이 주르르 흘렀다. 하지만 그냥 삼켜 버렸다. 물어볼 자격이 있는가. 가슴 아플 자격이 있는가. 짧게 가르치긴 했어도, 네가 알고는 있어야 될 거 같아서 전화했다. 삼킨 말들에 목이 메어왔다. 그래 건강하고, 나중에 볼 일이 있으면 다시 연락할게.
정적이 흐르던 통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뚜우우우우…… 수화기를 집어 들고 한참을 서있었다. 방안에 스멀거리는 어둠이 차오를 때까지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조용히 나를 갉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어두운 벽에 안타까운 그림들이 투영됐다. 찰칵찰칵. 마치 영사기 같이. 그 가을 고양이가, 그 가을 너구리가, B동의 급경사가, H동의 꽃눈이, 동윤이가, 또 내가.

2년 전 여름이 떠올랐다. 마침 헌책으로는 보기 드물게 깨끗한 중고 백과사전 한 질을 공부방에 들여온 후였다. ‘우리 동네 그리기’에서 동윤이의 집이 잘려나간 얼마 후였을 거다. 교실에 성호 선배와 같이 앉아있는데 선배가 백과사전을 펼쳐보고 있었다.
“다 늙어서 무슨 바람이에요? 백과사전을 다 뒤적이고?”
선배는 나를 보며 한 번 씨익 웃더니 느릿느릿 백과사전을 읽어 내려갔다.
“개구리밥……. 부평초, 수평, 머구리밥, 자평이라고 한다. 논이나 연못의 물위에 떠서 산다. 흰색 꽃이…… 7∼8월에 간혹 피지만…… 매우 작아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요? 라는 표정으로 한동안 선배를 쳐다봤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푸욱 쉰 선배는 힘겨운 얘기를 걸어왔다.
“이 동네 말이야. 무슨 거대한 연못 같지 않아? 너도 봤겠지만 밖에 저 사람들…… 여기저기 떠돌다가 이리로 들어와 정착한 건데……. 그 사람들 삶엡… 작아서 찾아보기도 힘들다는 꽃조차 못 피워보고…… 이 동넨 결국 철거된단다. 결국엔 다들 개구리밥이야……. 안 그러냐?”
선배는 그날 오전에 백과사전을 뒤적이던 동윤이를 봤다고 했다.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가 기특해서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데 아이가 유난히 그 페이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고 했다.
“내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 애가 뭘 안다고…….”
선배는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그날 이후 내게는 동윤이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무의식중에 안쓰럽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던 걸까…… 동윤이는 그 즈음 나를 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럴까. 동윤이도 무너진 집 터를 다시 찾게 될까. 아이의 꿈에도 밤새 옛집이 나올까. 문득 그때, 동윤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개구리밥 같아요.
베개 위로 투둑 탁한 눈물이 흘렀다.
우리 동네 이제 부서지는 거죠? 말 안 해 줘도 알아요.
또 눈물 한 방울.
그렇지 않아.
다소 엄한 말투로 녀석을 꾸짖었다.
뿌리가 있으면 뭐해요. 물 위에 떠있는 신세에요.
제발 그만 좀 해!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켰다. 기우뚱하는 것이 중심이 잡히지 않는다. 이상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내가 그 탁한 눈물의 연못에 떠있다. 등에서는 간질간질 잔뿌리가 자란다.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진다. 저 물밑으로, 저 물밑으로 잔뿌리는 아련히 내려간다. 하지만 끝내 바닥에 닿지 못하는 것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이었다.
우리 집이 잘려나갔어요. 문고리는 망가졌고요, 마당 앞 감나무도 말라죽었어요. 고양이는…… 고양이는 어디로 간 거죠?
너무 어지러운 나머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연못의 기슭에 닿지 않는다. 온갖 나무들이 우거진 그곳에도 어둠이 내려앉았다. 노란 두 눈의 웅크린 너구리가 날 노려보고 있다. 놈의 붉은 주둥이 쪽이 씰룩거린다. 킬킬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씹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꿈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시간. 차분한 선율이 라디오에서 나온다. 그 선율을 배경으로 진행자가 끝인사를 한다.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정희 님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란 시의 일부분이죠. 오늘 하루 영혼에 상처받으신 분들, 편히 쉬시고 새로운 아침 맞이하세요.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등불은 켜지는 법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긴 들숨과 날숨 사이, 내 어깨는 조용히 흔들린다. 그리고 그 날숨의 끝에 다시 눈물이 묻는다. 흐으으으으으…… 깊고 짙은 신음과 함께 결국 몸을 조용히 누인다. 행여 나의 상한 뿌리가 바닥에 닿을지 모르는 실낱 같은 기대를 걸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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