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현
의대 교수ㆍ의학과 및 생명공학공동연구원

언제부터인지 우리 주변에는 소위 퓨전문화가 유행하고 있다. 음식, 패션,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동ㆍ서양의 문화가 융합되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퓨전열풍은 비단 문화계뿐만 아니라 현대과학에서도 큰 화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현대의 생명과학이 직면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수십년간 전혀 다른 영역에서 발전해 온 복잡계의 연구와 융합되어 ‘시스템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가 창출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면에는 지금까지 생명과학계의 주된 연구가 특정 현상에 관여하는 요소를 ‘발견’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온 데 반해 정작 생명현상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요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비로소 복잡한 생명현상을 만들어내는지 ‘논리’적인 탐구가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청이 잠재되어 있다. 우리는 특정질병과 관련된 유전자, 단백질 등의 발견에 관한 뉴스를 종종 접했지만 그와 같은 발견으로 인해 질병이 극복된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는 생명현상이 특정 요소의 작용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최대의 화두는 명실공히 생명과학인 듯하다. 소위 선진국에서는 생명과학기술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학제 간 공동연구다. 대표적인 예가 생명과학, 수학, 공학, 물리학 등이 융합된 시스템생물학 연구다. 여기에는 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전제되어 있기도 하지만 학제 간의 벽을 허물고 서로의 장점을 활용하여 생명과학의 공유된 연구주제를 함께 탐구하는 열린 자세와 아울러 학문의 새로운 시도를 인내하며 성원하는 사회의 성숙된 분위기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 국제적인 흐름을 뒤늦게나마 인지하여 최근 생명과학 분야에서도 학제 간 공동연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일부 형성되고 정부에서도 이를 피상적으로 독려하고 있으나 전문가 풀(pool)의 한계로 인해 막상 융합연구가 제대로 기획되거나 평가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획일화된 연구분야 분류에 따라 평가가 이루어지다 보니 어느 한 분야에서만 평가를 받게 되고 결국 분야별 학술조직의 폐쇄성 때문에 제대로 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경계에 놓여 있는 분야를 서로 인정하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듯하다.

퓨전문화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융합과학은 결코 그 매력만큼 접근하기 용이하지는 않다. 과학의 발전은 분명 전후 우리가 일구어온 초고속 경제성장과는 달라야 하며 경제논리만으로 평가되어서도 안 된다. 결과보다 그 발전과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진지하고 성숙된 사회여건이 뒷받침되어야만 진정한 과학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가 진정 융합과학과 같은 학문의 창의적 발전을 기대한다면 강제적 경쟁을 유발하기 위해 단지 연구성과를 정량화하고 서열화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교수들이 마음껏 사유하고 시도하고 실패할 수 있도록 인내하며 지켜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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