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만남

「 왕의 남자」는 톱스타 없는 캐스팅, 평범한 예산으로 어떻게 역대 흥행 1위 영화에 등극할 수 있었을까? 2003년 6주의 군사작전으로 이라크 후세인 정부를 붕괴시켰을 때만 해도 금방 찾아올 것 같던 이라크의 질서와 평화는 왜 아직도 요원한 것이며, 미국은 왜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것일까?

상상의 한계를 시험하는 세상의 복잡한 현상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연과학을 필두로 오랜 세월 발전해 온 환원주의적인 접근법에 따르면 현상을 분해하여 개체의 속성으로 파고드는 것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르면 「왕의 남자」의 흥행돌풍은 시나리오가 훌륭해서 혹은 이준기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며, 이라크의 혼란은 부시와 백악관 보좌진들이 무능해서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의 한계는 이미 여러 학문분야에서 지적돼 왔다. 개개의 구성요소보다도 전체적으로 형성되는 구조와 이들 개체 및 구조 사이의 상호작용이 핵심이다. 쉽게 이야기해 너와 나, 그리고 세상과 나와의 ‘관계’에서 복잡한 현상들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이에 따라 제도적 개인주의, 구성주의 접근 등의 이름으로 미시요소와 거시구조 및 현상을 연계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복잡성과학은 여기서 더 나아가 문제의식을 자연과학까지 확장시키면서 새롭게 떠오른 학문의 조류다. 자연계를 구성요소에만 주목하면 분자 등의 무생물이나 지능이 낮은 세균, 동식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환원주의 시각에 따르면 고도로 지적인 인간으로 이루어진 사회경제계가 자연계와 관계 있다는 것은 환각일지 모른다. 그러나 학문간 교류의 장이 열리면서 여러 자연계와 사회경제계의 현상들과, 그 개체들이 맺는 관계 구조에는 놀랄 만큼 많은 유사성이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

예를 들어 심각한 재앙을 불러오는 대지진과 주식시장의 대폭락을 조사해보면 지각의 암석들과 시장 거래인들이 점차로 구조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움직임을 일치시켜가며 공통적인 전조증상을 나타내는 것이 관찰된다. 또 대형 산불, 대형 정전사태의 발생 직전에는 숲의 나무들과 전력공급망의 설비들이 뜻하지 않게 사태 확산에 적당한 구조로 자리 잡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처럼 ‘관계’의 측면에 주목하면서 요소와 구조, 또는 부분과 전체의 상호의존성이 빚어내는 집합적 현상을 탐구하는 통합학문이 바로 복잡성과학이다. 의미있는 점은 광범위한 자연계와 사회경제계를 ‘복잡계’라는 공통의 틀에서 바라보면서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복잡성과학 분야에서 자연과학자는 수리적[]정량적인 기법을 통해 동태적인 변화를 기술하며, 인문사회과학자는 이를 현실적으로 해석하고 정책적 대안으로 연결시킨다.

이러한 움직임은 분명 학문 사이의 벽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학문 풍토 속에서 정착되고 꽃피울 수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1980년대 이래 복잡성과학 분야가 상당한 진전을 이뤘으나 한국에서는 학계의 보수성, 배타성으로 인해 발전이 더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물리학, 사회학, 경영학 등에서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열정과 유연성을 갖춘 연구자들의 커뮤니티가 활발히 떠오르고 있다. 필자도 젊은 연구자의 일원으로서 조만간 우리의 대학사회에서도 복잡계를 화두로 한 발전적인 학제 간 연구결가  풍부해질 것을 기대한다.

채승병 연구원 삼성경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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