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명사에 대한 심화된 언어학적 이해

지난 10월 7, 8일 양일간 명사 의미부류 체계의 구축 문제를 주제로 언어교육원과 파리13대학 전산언어학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국제학술회의가 문화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모임은 두 기관이 2002년 맺은 교류협정에 의거하여 서울과 파리에서 번갈아 개최하기로 한 언어학 국제학술회의의 첫 번째 모임으로 언어교육원 창립 4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치러졌다. 파리13대학 전산언어학연구소장인 가스똥 그로스 교수와 헝가리 과학아카데미의 페렌츠 키퍼 교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의 외국학자와 네 명의 국내 학자가 초청되어 모두 아홉 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논문발표에 준하는 상세한 논평과 토론이 이루어졌다.

 

 

명사 의미부류 체계의 고안은 언어학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어 어휘요소의 체계적 의미기술다의어의 의미구분이나 어휘의미관계의 기술을 포함하는, 또는 어휘 결합관계예컨대 ‘유괴하다’의 주어로 인물명사가 선택되고 ‘연주하다’의 보어로 악기명사가 선택되는 것과 같은 제약관계의 정밀한 표상을 위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연구주제이다. 70년대 이후에는 인지언어심리학뿐 아니라 인공지능 연구의 하위영역인 자연어 처리분야에서도 그 필요성이 인식되어 전산언어학자나 언어공학자 사이에서도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의미부류체계의 문제는 이제 학제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번 연구발표에서는 젤리그 해리스의 변형주의 통사이론을 이어받아 비주류의 독특한 어휘부 중심의 언어표상모형을 개발한 프랑스의 언어학자 모리스 그로스 교수의 어휘문법을 계승ㆍ발전시키고 있는 가스똥 그로스 교수의 대상부류론을 주된 이론적ㆍ방법론적 틀로 삼아 불어와 한국어 명사 의미부류 체계 구축작업의 주요 측면, 쟁점, 구체적 기술 사례와 언어학적ㆍ전산적 활용 사례들이 논의되었다.

 

 

대상부류론은 언어독립적인 위계적 개념체계(온톨로지나 시소러스)에 의거한 어휘요소의 하향식 분류체계 고안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 어휘가 보여주는 특징적인 언어 속성에만 의거하여 의미 분류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인 점이 가장 특징적이다. 예컨대 꽃, 백합, 백일홍, 장미 등 꽃의 부류명사는 식물의 번식과 존재론에 관련된다고 특징짓기 이전에, 피다, 만발하다, 지다, 시들다 등의 주어 위치에, 또는 꺾다, 따다 등의 보어 위치에 올 수 있으며 수 표현에서는 그루나 포기가 아니라 송이로 대표되는 어휘들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언어적 행태를 공유하는 점에서 하나의 부류로 설정될 수 있으며 이렇게 구성된 의미부류가 대상부류로 지칭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명사, 나아가 동사나 형용사를 포함한 어휘 요소의 의미부류 체계 구축은 체계화된 대규모 어휘정보의 표상과 처리를 전제하므로 필연적으로 전산어휘부/전자사전의 존재양태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다양한 자연어 처리 시스템을 지원할 뿐 아니라 전문번역가를 지원하고 상급의 어휘교육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발표에 참여한 국내학자들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지난 3년간 그로스 교수 연구진과 공동으로 대상부류론을 근간으로 하는 한국어 명사의 미부류 체계 구축 작업을 진행해 왔다. 또 문화부가 주관하는 ‘21세기 세종계획’ 내의 대규모 한국어 전자사전 개발 작업에 참여하여 그 연구성과를 명사와 동사, 형용사 의미기술에 활용해 왔다.

 

 

이번 모임은 이러한 연구활동의, 아직은 미완인 일차적 성과를 국제적으로 공표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하겠다. 내년으로 예정된 다음 파리 모임에서는 보다 완벽하게 정비된 한국어 명사 의미부류체계를 공개해 불어체계와의 대조를 통한 한국어 명사어휘부에 대한 언어학적 이해를 심화하고, 특히 한ㆍ불 양국어 간의 기계적 정보처리에 기여할 바가 확보되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 현대 언어학 연구의 정착과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어학연구소가 바람직하지 못한 실용주의적 연구소 정책에 밀려 언어교육원으로 전환되었지만, 이번과 같은 학술회의가 언어교육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열린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로, 인문과학의 핵심적 영역인 언어학 분야의 이러한 국제학술 교류활동이 더욱 강화되고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홍재성 인문대 교수ㆍ불어불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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