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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했던 학제 변천사서울대 개교 60주년 특집
  • 대학신문
  • 승인 2006.04.08 22:07
  • 수정 2006.04.09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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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규 기자 scv21@snu.ac.kr
안은진 기자 churpy5@snu.ac.kr
최민정 기자 junga86@snu.ac.kr

서울대는 올해로 개교 60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서울대의 학제는 시대상황에 따라, 정부 교육정책에 따라 큰 변동을 겪었다. 서울대 구성원들은 학제 변화에 따라 여러  영향을 받기도 했고, 종종 적극적으로 정책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다. 『대학신문』은 학과편성구조와 신입생 모집단위를 중심으로 서울대의 학제 변천사를 짚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 1946년 국립서울종합대학안 파동

1946년 7월 13일 ‘국립서울종합대학안’(국대안)이 발표됐다. 문교부가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경성대,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등 10개 학교를 통합해 국내 최초의 종합대학을 설립하고자 한 것이다.

국대안 발표 후 좌익계 교수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극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국대안이 몇몇 교육 관료에 의해 일방적으로 확정됐고 ▲국대안에 기반한 서울대가 경성제국대학을 모체로 하며 ▲미국인 대위가 초대 총장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 이 주장은  당시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문교부는 결국 국대안 시행을 강행했고, 이는 전국적인 동맹 휴학과 교원 총사퇴를 불러왔다. 이에 대응해 문교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학원가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후 제적 학생들이 복교되고 한국인 초대총장인 제2대 이춘호 총장이 임명되면서 사태는 약 1년 만에 일단락됐다.

국대안 파동은 서울대 탄생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보여준다. 1946년 당시 사범대 2학년생이었던 한기언 명예교수(교육학과)는 “동숭동 문리대 정문에서 입학등록을 하려는 학생들은 이를 막으려는 좌익 학생들의 ‘인의 장막’을 굳은 각오로 뚫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 1952년 부산 가교사 시절 상과대 기숙사

◆ 1951년 전시연합대학 설치와 부산 가교사

한국 전쟁으로 정상적인 교육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1951년 부산, 대구, 전주 등 전국에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해 출신학교에 상관없이 수업을 듣게 했다. 이후 전세가 회복되자 서울대는 1952년 봄 부산에 가교사를 지어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교원과 물자의 부족으로 강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현역 군인이 학생의 반을 차지했다.

◆ 1961년 사범대 축소 조치

1961년 9월 3일 「사대뉴스」에는 다음과 같은 논설이 실렸다. “방학이 끝나고 신학기가 시작되어서 모두 기쁜 얼굴로 대면하게 되었어야 할 일이나 이번은 사범대학의 존폐문제로 우울하기 한이 없다. 대학 내에서 모든 화제는 여기에 집중되고 있다.”

이틀 뒤 사범대의 가정과ㆍ체육과ㆍ생물과ㆍ일반사회과를 제외한 나머지 학과들은 모두 폐지한다는 내용의 「국립대학 정비절차」가 발표됐다. 이는 중ㆍ고교 교사 채용 시 사범대 졸업생과 문리대 졸업생 사이의 충돌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폐지된 학과 학생들은 문리대로 전과하게 됐다.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은 사범대 교수들과 학생들이 크게 반발했고, 사범대와 문교부의 마찰이 심화돼 급기야 사범대 교수 세 명이 파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조치로 인해 교사양성ㆍ배출의 중추기능이 위축되자 문교부는 1962년 폐지됐던 사범대 학과를 부활시키고 파면된 교수들을 복직시켰다. 또 1963년 전국 최초로 서울대에 교육대학원이 신설됐다.

◆ 1974년 계열별 모집

1974년 대학당국은 학과별로 나뉘었던 모집단위를 인문ㆍ사회ㆍ자연ㆍ교육ㆍ가정ㆍ농학 등 여섯 계열로 통폐합했다. 학생의 적성보다는 합격 가능성이 중시되는 ‘학과별 모집’의 폐단을 없애고 기초교양교육을 받을 기회를 충분히 준다는 취지였다. 이는 2002년 도입된 ‘모집단위 광역화’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인기학과에 학생들이 편중되고 희망ㆍ적성보다는 성적이 학과배정의 기준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으며, 이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80학번 이주형 교수(고고미술사학과)는 “인기학과 편중 현상은 지금보다 그 때가 더 심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이러한 문제점이 드러났음에도 계열별 모집은 10년 동안 지속됐다. “희망 학과에 배정되는 학생의 비율이 높은 편이고(1975년 자연계열의 경우 60~95%) 학과별 모집을 실시했을 경우 입학하지 못했을 우수 학생들이 계열별 모집을 통해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인기학과 편중 문제가 해마다 발생하자 결국 1984년 다시 학과별 모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 1975년 2월 28일 동숭동 캠퍼스와의 코별식. 교수와 직원들이 본부에 걸려있었던 서울대학교 간판을 떼내고 있다. 학생들은 같은 날 4·19 기념탑 앞에서 굿으로 고별식을 대신했다.

◆ 1975년 캠퍼스 이전과 종합화

1975년 2월 흩어져 있던 단과대들이 관악의 본(本)캠퍼스, 연건의 의학캠퍼스, 수원의 농학캠퍼스로 통합이전했다. 이전까지 문리대와 의대, 법대만 동숭동에 모여 있었고 공대(공릉동), 사범대(용두동), 상대(종암동), 음대(방산동) 등 나머지 단과대는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이때 학과체제에도 대대적인 개편이 일어나 문리대가 인문대, 사회대, 자연대 등 3개의 기초학문대학으로 나눠졌다. 또 상과대는 해체돼 경제학과가 사회대에 통합됐고 경영학과는 경영대로 독립했다. 이러한 캠퍼스 종합화는 인접학문과의 협조를 통해 연구 능률의 극대화를 성취하는 데 기여했지만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구성원들도 있었다. 『서울대 구술자료집』에 따르면 김채윤 명예교수(사회학과)는 “문리대 해체를 반대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해체 이후 학과별 전문화가 이뤄지긴 했지만 각 학문의 시야가 좁아져 버린 것 같다”고 회고했다.

또 이전까지 교수와 학생은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종합화 이후 교수와 학생의 만남은 공식적인 강의나 분담지도를 통해서만 이뤄지게 됐다. 황윤석 전 교수(독어독문학과)는 “동숭동 문리대 시절엔 소속 학과 교수가 아니더라도 예의를 갖추고 인사했는데 이후에는 학생들이 내가 교수인 줄도 모르더라”고 말했다. 또 황 교수는 관악캠퍼스 이전에 대해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학생들의 데모를 막기 위해 서울대를 관악캠퍼스로 이전시켰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고 덧붙였다.

   
▲ 1981년 2월 20일 학과 배정 발표에서 자신의 학과를 확인하는 학생들의 모습. 계열별 모집으로 입학한 당시 학생들은 학과 성적이 좋아야 원하는 학과에 갈 수 있었다. 1981년 당시 공대에서는 인기학과로 알려진 기계학과가 미달 사태를 빚는 등 눈치작전이 치열했다.
◆ 1981년 졸업정원제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나고 재입학할 수도 없다면? 실제로 서울대에 그런 제도가 있었다.

대학진학 희망자에 비해 대학 입학정원이 턱없이 적었던 1970년대 말, 문교부는 대학 입학정원을 크게 늘리는 대신 졸업자 수를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981년부터 시행된 ‘졸업정원제’는 졸업정원보다 더 많은 학생을 모집한 후 이들이 졸업할 때까지 성적이 나쁜 학생들을 매년 유급ㆍ탈락시키는 제도다. 이에 따라 1981년 입학정원 6530명 중 5020명만 졸업할 수 있도록 규정됐다. 그러나 1981년에 정원보다 훨씬 적은 학생들이 입학했고, 이들 중 제적생이 많아 탈락자가 발생한 첫해인 1983년 실제로 탈락한 학생은 13명이었다.

면학 분위기를 장려한다는 점에서 이 제도를 적극 옹호하는 교수들도 있었지만 학생들의 반발은 심했다. 탈락의 공포 때문에 학생들이 학점에 과도하게 집착했고, 경쟁의식으로 인간관계가 소원해졌던 것이다. 시험에서는 상대평가제까지 적용돼 학생들의 부담이 커졌고, 신입생들 사이에 교양영어 교재 번역판과 수학 풀이집이 나돌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졸업정원제는 보완조치가 거듭되다 점점 유명무실해졌고, 결국 1988년 폐지됐다.

   
▲ 1977년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 관악캠퍼스 이전 후 정문 쪽에 지금과 같은 모습의 교문이 들어서지 않은 상태다. 지금의 교문은 같은해 2학기에 착공됐다.

◆ 1995년 경 학부제 도입

1994년 경 유사한 학과들을 통합하는 학부제 시행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학부제는 동일학문 분야 내에서의 지나친 학과 세분화가 일으키는 전공교육 파행을 시정하기 위한 대책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부제 시행은 교육부의 지원을 노리고 충분한 협의없이 추진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당시 대기과학과의 한 교수는 “반대하는 소규모 학과 교수들의 의견이 다수결 투표에 의해 묵살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대학신문』 1995년 9월 18일자). 또 학생사회에서는 학과 중심의 유대가 깨질 것이라는 우려도 높았다. 1990년대 초부터 학부제가 시행됐던 공대와 자연대 일부 학과 학생들은 후배들이 갑자기 많아지자 ‘우리 후배’라는 느낌을 갖지 못했고, 신입생들도 소속감을 갖지 못해 학회 등 학과 내 공동체가 쇠퇴하기도 했다.

결국 1997년까지 공대와 자연대, 농생대에서는 여러 학과들의 모집단위가 통합됐지만, 반대가 심했던 인문대와 사회대에서는 학부가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편 학과 간 연관성이 다른 단과대보다 높은 공대는 학과 통합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뤄졌다. 한민구 교수(전기공학부)는 “학부제 시행 후 학생들의 전공 선택 폭이 넓어졌고 교수들의 학과 간 교류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 2002년 모집단위 광역화

“학부생들이 다양한 전공을 접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재편하고, 직업교육은 전문대학원에서 실시한다”는 ‘5ㆍ31 교육개혁안(1995년 발표)’에 따라 서울대는 2002년 전면적으로 모집단위 광역화를 도입했다.

하지만 광역화가 시행되자마자 ▲인기전공 편중 ▲학생들의 지나친 경쟁 ▲교과과정 개편 미비 등 예견됐던 문제들이 그대로 나타났다. 전문대학원제 시행이 함께 이뤄지지 않아 학부에서 기초학문과 응용학문의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었고, 통합교과 등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제도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모집단위 광역화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2002년 이후 현재까지도 농생대 등 많은 단과대에서 거의 해마다 모집단위와 전공배정 시기가 조정되고 있다.

◆ 향후 학제는?

1990년대 이후 서울대는 폭넓은 기초교육을 실시하는 ‘학부대학’과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전문대학원’체제를 지향해 왔다. 지난 2004년 이를 위한 단계별 목표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상은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본부 기획실 관계자는 “학부대학-전문대학원 체제는 학교의 공식적인 입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 수준”이라고 말했다. 학부대학의 중간과정으로 거론됐던 자유전공제도 마찬가지다. 교무부처장 여정성 교수(소비자아동학부)는 “지난해 자유전공제 도입을 놓고 회의에서 여러 가지 의견이 오갔으나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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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 관악캠퍼스 이전 후 정문 쪽에 지금과 같은 모습의 교문이 들어서지 않은 상태다. 지금의 교문은 같은해 2학기에 착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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