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자금 정국 와중의 정치권에서 ‘반성’이란 단어가 자주 회자된다. 그런데 반성에도 두 종류가 있다.

 

고교시절을 회상해 보자. 화장실에서 몰래 흡연하거나, 단체미팅 주선 티켓을 팔다 적발된 학생은 ‘반성문’이란 것을 쓰게 된다. 무단통치가 행해지는 일부 엽기적인 사립고에서는 교련실로 끌려가서, 문민화되고 개명된 학교의 경우에는 학생주임실에서 ‘지도’와 ‘반성’을 강요받는다.

 

그런데 “반성하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잘못했습니다”로만 반성문을 일관하는 ‘비행(非行)고교생’은 치도곤을 맞는 게 상식이다. 왜냐하면, 학생주임이 요구하는 반성이란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주임이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신만이 그 진실됨의 여부를 알 법한 선언적 반성’이 아니라, ‘그 진실됨의 객관적 징표가 타인이 확인가능한 형식으로 드러나는 반성’이다. 그 ‘객관적 징표’란 뭘까. 미처 적발되지 않은 ‘여죄’를 순순히 ‘부는 것’이다. 말로만 하는 반성의 진실성을 놓고 눈빛과 표정을 응시하며 독심술을 발휘하는 데 비하면, 이 얼마나 계몽적이고 이성적인 기준인가.

 

그러나 간혹 교생실습을 나온 어리숙한 예비교사들이 이런 비행고교생들을 조사할 때에는 “교사는 교육자이지 취조관이 아니다”는 순진한 이상주의에 빠지곤 하여, ‘오로지 신만이 진실성을 판가름할 수 있을 정도의 반성’만을 한 채 ‘공범자의 의리’를 팔지 않고도 용케 위기를 모면하는 학생들이 생긴다. 이처럼 반성에는 두 종류, 즉 숙련된 학생주임이 요구하는 반성과, 어리숙한 교생실습생에게나 통하는 반성이 있다.

 

한국정치사에서도 각각의 전형적인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전자의 예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인데, 1949년 여순반란사건 당시 남로당 군조직책의 일원이었던 그는 특무대에 끌려가 객관적 증거가 담보된 반성, 즉 ‘동지’들의 명단을 ‘붊’으로써 군에 복귀하여 장성을 거쳐 마침내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례는 굳이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불법적인 정치자금 문제를 놓고 정적을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의 당이 그 열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았다는 정황이 드러나는 와중에도 잡아떼기로 일관하다가,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된 연후에도 검찰수사에 발목을 걸면서 ‘반성’을 선언하는 정치인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전의 송두율 교수사건에 대해서는 “수사당국이 진실을 밝히고 난 뒤에야 행하는 반성의 가증스러움”을 비난하며 ‘학생주임의 입장’을 고수하던 거대언론들이 보수 정치인의 ‘사후적 반성’에 대해서는 관대하다는 점이다.

 

언론시장의 소비자이기도 한 유권자들은 언제까지 이들에 대해 ‘순진한 교생실습생’의 관용을 베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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