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김예리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봄날이었습니다. 저는 갓 스물이 되었고, 이유 없이 세상은 슬펐습니다.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이탈의 자유 뒷면에 ‘삶을 방목시킨 자가 그려놓은 그 고투의 흔적’까지 볼 수 있던 시인에게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호응 없는 열광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로움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고민고민하다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다가가 수줍은 사랑고백을 했지만 마침 그때 그녀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야구 중계에 집중하고 있었다거나, 앞에 있는 사람에게 하이파이브를 하려고 손을 치켜들었지만 그는 마침 그때 옆에 있는 사람과 잡담을 시작했다거나 그랬을 때 다가오는 머쓱함과 비슷할 겁니다. 이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에 ‘부끄러워하는 손’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지 않을까요?

그래도 다행히 제 옆에는 K와 S가 있었고, 우리는 세상의 슬픔을 잘 소화시켜내는 이들의 시와 소설에 감동하고 열광했습니다. 「상춘곡」의 윤대녕은 자신의 집 앞에 있는 산에 벚꽃이 필 때 다시 한 번 보자는 옛 연인의 말을 기다리지 못하고, 따뜻한 남쪽으로 먼저 벚꽃을 맞이하러 떠납니다. 붉은 동백으로 유명한 고창 선운사로 말입니다. 7년 전 그는 그녀를 선운사로 불러 내렸고, 사랑의 줄다리기에서 먼저 손을 놓아버린 그녀는 선운사로 뛰쳐 내려와 눈물을 철철 흘리며 그의 가슴을 쿵쿵 쳐댑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경하게도 부처님의 발 아래서 물과 불이 다 타고 마를 때까지 정사를 치릅니다. 이 불경함이, 그들의 사랑이, 윤대녕의 연애담이 우리는 마냥 좋았습니다. 이렇게 윤대녕의 연애담이 마냥 좋기만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스물일곱이 되었고, 스물여덟이 되었고, 스물아홉이 되었습니다. 윤대녕의 연애담이 마냥 좋기만 했을 때는 몰랐는데, 주름에도 무게가 있더군요. 주름에도 무게가 있어 제 어깨를, 허영기가 조금 묻어있는 제 자존심을 조곤조곤 내리누르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톡스 주사를 맞는 이유가 예뻐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씩 생겨나서 조금씩 짙어지는 주름이 너무 무거워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이를 잘 먹는 것, 소화불량되지 않게 잘 먹어가는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불경하게도 멋진 윤대녕의 연애담이 시시해지고, 웬만한 일에는 쉽게 감동조차 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윤대녕만큼이나 멋진 연애담을 짤막한 시구에 담아내는 장석남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젠 잠이 깨어서도 막막함이 없다. 막막하기 전에 신문지를 찾고 막막하기 전에 마당에 심은 치졸들을 들여다보고 막막하기 전에 시를 읽는다, 막막하기 전에 술을 마신다, 막막하기 전에 취하고, 막막하기 전에 잠을 부른다, 배가 불러도 반성이랄 것도 없다, 부른 배가 부른 잠을 그대로 받아 안는다. // 멀리서 호오이 호오이 밤새가 운다. 저것이 비명이란 것도 모르고 나는 잠을 자고 있었구나.”(「치졸당기(稚拙堂記)」) 이 ‘막막함’, 이 ‘비명’이 사실은 우리가 치열하게 숨을 쉬게 하는 원동력인데요, 위장이 조막만한 저는 무서웠던 겁니다.

그러다가 성미정이라는 시인은 저에게 이런 말도 건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빠쪽한 보랏빛 콧수염을 달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당신의 빠쪽한 보랏빛 콧수염은 보이지 않았지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도 없고 더 이상 찾지도 않았지요 사실은 결혼한 사내가 빠쪽한 보랏빛 콧수염이나 매만지고 있어선 안 된다는…… 당신이 자는 척하고 있을 때 제가 몰래 떼어 버렸지요(…) 오늘도 당신은 넥타이로 만든 어색한 콧수염을 달고 집을 나서고 그런 당신의 뒷모습을 볼 때면 저는 안주머니 깊숙이 숨겨둔 당신의 빠쪽한 보랏빛 콧수염을 꺼낼까 말까 갈등하지요 하루에도 몇 번씩”(「하루에도 몇 번씩 당신의 빠쪽한 보랏빛 콧수염을 꺼낼까 말까 갈등하는 당신의 안해갯) 이 시 앞에서 저는 혹시 내 콧수염뿐 아니라 K와 S의 콧수염도 훔쳐버린 것은 아닌지 깜짝 놀랍니다. 옆에 있는 K와 S에게 슬며시 미안해집니다.

봄날입니다. 연애대장 윤대녕은 봄이 ‘삶과 죽음이 갈리는 계절’이라고 하고, 로맨틱한 장석남은 봄이 ‘꽃피는 난세’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야 갓 서른을 넘겼을 뿐인데, 이 봄이 참 막막합니다. 막막하다니 다행인거지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저는 코밑의 ‘빠쪽한 보랏빛 콧수염’이 잘 붙어있는지 슬쩍 한 번 튕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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