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토마스 만, 『키 작은 프리데만씨』- 권여선 소설가

나는 이 작품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중간부분은 일독을 권하는 차원에서 생략할 것이다. 작품의 첫 문장은 이렇다. “그것은 보모의 탓이었다.” 무엇이? 프리데만씨의 작은 키가. 나도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 물론 이 문장 그대로는 아니고, 이런 말 건넴의 스타일, 이런 유발의 구조로 말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죽은 원인이 밝혀졌다”든지, “도저히 그들은 결혼할 수 없었다” 같은. 도입부에 한 문단 정도로 짧게 요약된 프리데만씨의 키에 얽힌 일화는 그 자체로 단편소설이 되고도 남을 만큼, 아니 능력 있는 작가라면 충분히 장편소설로 엮어낼 만큼 흥미진진하다. 다만 내가 그런 능력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보모의 알코올중독 혐의가 드러났을 때, 아기 프리데만의 엄마인 프리데만 부인은 당장 그런 못된 습벽을 고칠 것을 엄명하는 동시에 매일 적포도주 한잔씩을 주는 ‘당근과 채찍’ 처방을 병행한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교정되는 증상이라면 그건 중독에 대한 모욕이겠다. 이 처녀-노파도 아니고 처녀가 알코올중독이라니 엄청난 사연이겠다-는 적포도주 한 잔으로 메울 수 없는 결핍을 취사용 기구에 쓰는 알코올로 대체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를 눈치 챈 프리데만 부인이 다른 보모를 물색하는 와중에, 즉 새로운 보모가 고용되기 직전에 불상사는 일어난다. 개인적이든 역사적이든 사건은 이때, 옛 것은 죽었으나 완전히 죽지 않고 새 것은 생겨나려 하나 완전히 생겨나지 않은 시점에 발생한다. 프리데만 부인이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목격한 광경은 기억의 화폭에 두고두고 담아둘 만하다. 생후 한 달밖에 안 된 아기 프리데만은 탁자에서 굴러 떨어져 처절한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쓰러져 있고 보모는 그 옆에 멍하니 서 있다. 나는 여기서 중독에 대한 하나의 정의를 얻는다. 중독이란, 우리의 성품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자기 행위의 결과로부터 끔찍하게 소외되도록 이끄는 무엇이다. 절묘하게도 보모의 망연자실은, 그 발밑에서 처절한 경련을 일으키는 아기 프리데만의 모습과 통한다.

결말에서도 프리데만씨는 똑같은 자세를 취한다. 원고 매수가 넘치는 관계도 있고 궁금증 유발의 꼼수도 작용하여 짧게 요약하자면, 키 작은 꼽추신사 프리데만씨는 풀숲에 얼굴을 처박은 채 경련을 일으키다 깨어난다. 여자에게 내동댕이쳐졌다는 점에서 생후 1개월에 당한 불상사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개같은 취급을 당한 그는 처음엔 상대에 대한 분노를, 다음엔 자신에 대한 구토를 느낀다. 그는 두 감정이 서로 통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배를 깔고 엎드린 채 벌레처럼 몸을 밀고 나아가 강에 첨벙 빠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강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물 속에 떨어지게 한다”는 표현이다. 여기서 나는 중독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를 얻는다. 우리는 중독에 풍덩 빠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물건처럼 질질 끌고가 중독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중독된 자신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에게 이롭지도, 허용되지도 않는 것을 깨끗이 단념하지 못하는 인간은 불행하다. 얼마나 단념하려 애썼던가. 애초부터 없던 것으로 간주하려고, 그 있음이 출현할 때마다 목숨 걸고 외면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러나 순간에 무너지고 순간에 미혹된다. 프리데만씨 내부에서 찰나에 포효하며 튀어나온 낯선 욕망과 그걸 제어하려는 안간힘은, 작품에 표현되진 않았지만, 보모도 쓰라리게 경험한 바이리라. 중독의 증상은 한결같지만 중독된 영혼은 스페셜하게 고통 받는다. 프리데만씨보다 키 작은 나의 재능이 언젠가 이 고통을 언어화할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중독을 배제하는 건강한 문명에의 중독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중독되는 어느 찰나일 것이다. 무섭게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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