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신문』이 만난 사람 - 소설가 박완서
서울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50학번 박완서. 우리 시대의 대표 소설가 박완서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이력이다. 그의 긴 인생에서 서울대 재학 시절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 인연으로 최근 그는 서울대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현역 문인’이고 싶다는 소설가 박완서를 당시 서울대 문리대가 있었던 동숭동에서 지난 26일(금) 만났다. |
◆ 우선 축하드립니다.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신 소감이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어요, 내가 학교를 너무 조금 다녔기 때문엡. 또 전에 명예박사 학위를 열 개도 넘게 받는 분을 봤기 때문에 남들이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걸 좀 우습게 여겼었어요. 서울대도 국립대라서 예전에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명예박사 학위를 많이 준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가당치 않은 일 같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싫다 그랬죠. 그래도 서울대에서 호의적으로 자꾸 강권하셔서 받았는데 막상 받으니까 좋더라고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 소설가로서는 최초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내가 잠깐 다녔던 서울대 문리대는 당시 최고의 인기와 권위를 누리고 있었어요. 우리 선배들이 문리대를 ‘대학의 대학’이라고 할 만큼 인문학이 존중됐어요. 인문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라고 봤던 거죠. 그 후에는 경제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순수학문보다는 법학이나 의학과 같은 응용학문이 대우를 받게 됐지만. 서울대가 소설가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준 것은 인문학에 대한 본연의 자세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생각해요.
◆ 선생님께서 서울대를 다닐 무렵의 정황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때는 5월에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었고, 시험을 본 후 6월에 입학했었어요. 50학번이 그런 점에서 특이해요. 일제시대에는 4월이 학년초였는데 해방이 8월에 됐죠. 해방 후에는 미국식을 따라서 9월이 학년초가 됐어요. 그런 혼란기가 지난 뒤에 나라에서 봄학기로 되돌아가야겠다고 결정했어요. 그런데 조정기간을 두기 위해 5월을 학기 말로 하고 6월을 학기초로 한 유일한 해가 1950년이에요. 그런 와중에 6ㆍ25전쟁이 나버렸죠. 전쟁 중에도 학교를 나가긴 했지만 그 상황에서 학교를 제대로 다녔다고 할 수 없고.
◆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내가 쓴 소설에도 많이 나왔던 이야기인데요. 내가 겪었던 힘든 일들, 죽음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이 일들을 소설로 쓰리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피난 중에 느꼈던 일들, 당시 정치상황을 보면서 느꼈던 일들, 참혹한 경험들, 그런 것들이 내 속에 그냥 있는 한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번은 (소설로) 풀어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죠.
◆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으십니까?
데뷔작『나목』은 40대의 평범한 주부였던 나를 작가로 변신시켜 줬습니다. 박수근 화백도 작품을 통해 더 유명해졌고요. 그런 면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죠. 또 최근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된『미망』도 기억에 남네요. 내 고향 개성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기도 하고.『미망』의 제목에 대해서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외국에서 온 한 40대 교수가 ‘미망(未忘)’을 ‘말망(末忘)’이라고 읽었던 적이 있어요. 또 음을 제대로 읽은 사람도 ‘미망’을 다른 뜻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그래서 정지용 시인의 시에서 한 구절을 빌려 제목을 다시 지었죠.
◆ 선생님의 작품은 젊은 사람에게도 인기가 많습니다.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주로 내가 아는 걸 위주로 글을 써요. 내가 쓴「너무도 쓸쓸한 당신」은 한물 갔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뤘지만(이 작품은 초로의 부인과 그 남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젊은 사람들도 많이 읽었다고 알고 있어요. 아마도 내 문장, 내 글이 진부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감각까지 진부해져서는 안 된다고 봐요.
◆ 선생님의 삶에서 ‘이야기’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냥 나는 어려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가 좋았어요. 또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반성하게 하는 거울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은 단순히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울을 보고 무언가를 ‘고치기’ 위해서잖아요. 문학은 당대의 삶을 비춰보고 반성할 수 있게 하는 거울의 기능을 하고 있는 거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문학은 지루하게 읽혀서는 안 된다는 점이에요. 건축에서 기능적인 부분과 미적인 부분이 똑같이 중요한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할까요.
◆ 선생님을 1세대 여성주의 작가라 평가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여성운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살아있는 날의 시작』이나『서 있는 여자』에서 의도적으로 여성문제를 다룰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때는 내가 상당히 선구자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이 돼버린 것 같아요. 현재의 여성운동은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 1990년대 중반부터 여성문인의 자전적 글쓰기가 활발해졌습니다. 이러한 자전적 글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우려먹는다’며 자전적 글쓰기를 혐오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나는 경험하지 않은 것을 쓸 수가 없어요. 또 자전적 글쓰기에 등장하는 ‘나’는 ‘사적인 나’, ‘밀실 속의 나’가 아니에요. 주로 그 시대, 그 당시 사회와 나의 관계에 대해 씁니다. 하지만 자신의 성적인 경험 등을 너무 과장하는 경우가 요즘 가끔 있는데, 그런 노출증 비슷한 자전적 글쓰기는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 책의 위기, 문학의 위기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문학이 갖는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즘 책이 잘 팔리지 않고 사람들이 책을 덜 읽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경험하고 싶어 하죠. 요즘 인기있는 드라마나 영화, 연극의 바탕에도 탄탄한 이야기 구조가 깔려 있어요. 모든 문화의 기본이 되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 유니세프 친선대사도 맡고 계십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으신가요?
우리나라에도 도와줄 아이들이 많은데 외국까지 가서 아이들을 도와야 하느냐는 시선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가난한 아이들과 외국의 가난한 아이들은 질적으로 상황이 달라요. 아이들이 그냥 굶어죽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상황이죠. 우리도 해방 이후 6ㆍ25전쟁 무렵 그런 상황이었어요. 아이들이 굶어죽고, 먹을 것이 없어 ‘꿀꿀이죽’을 먹기도 하고. 외국의 원조 없이는 거의 생존이 불가능했죠. 소말리아 등지의 아이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이제 우리나라가 그 아이들을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 고향이 개성(開城)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 경의선 철도 시험운행이 무산된 것에 대해 생각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경의선 철도 시험운행이 25일에 예정돼 있었는데, 그 전에 통일부에서 함께 가자고 연락이 왔어요. 하지만 그날 선약이 있어 안 되겠다고 했죠. 그 전에도 북한에 갈 기회는 있었지만 내 고향땅을 직접 밟을 기회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안 갔어요. 내 고향이 개성에서 7~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데 선영(先塋)이 다 거기에 있거든요.
◆ 여행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특히 네팔에 많이 갔어요. 거기서 말을 타고 트래킹(등산과 산책의 중간)을 많이 했습니다. 거기서는 산을 보고 마냥 걷기만 해도 신기해요. 아무리 걸어도 장엄한 설산이 그 자리에 굳건히 존재한다는 것에 감동하죠. 나는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동산이 좋아요. 그래서 얼마 전까지 집 근처 아차산을 많이 오르락 내리락 했죠. 일전에 아차산을 내려올 때 넘어진 뒤로 그 전만큼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산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아요.
◆ 후배 문인들과 서울대 학생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모든 것의 기본은 ‘고전 읽기’라고 생각해요. 그것만큼 큰 밑천이 되는 것도 없죠. 고전을 읽지 않고 얕은 재주를 부리면 금방 바닥이 드러나게 돼 있어요. 자기 자신을 더욱 큰 산과 비교할 수 있어야 해요. 아직도 나는 일본어로 된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전집을 갖고 있어요. 고전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몇 번이고 읽어야 해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독서보다 시험공부에만 열중하는 것 같아요.
소설가 박완서가 걸어온 길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박완서는 1944년 숙명여고에 입학했으며 1950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중퇴했다. 1953년에 결혼했으며 1970년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돼 등단했다. 이후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625전쟁, 분단, 여성 억압적인 현실 등을 소재로 작품을 주로 써왔다. 1993년부터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1994년부터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1998년부터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1981년에 제5회 이상문학상, 1994년에 제25회 동인문학상, 1997년에 제5회 대산문학상, 2001년에 제1회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98년에는 문화관광부에서 수여하는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지난 17일에는 서울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현재 구리시 아천동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며 활발한 작품활동과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