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

책의 소중함과 독서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명언들은 수없이 많다. ‘책 속에 길이 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지갑에 돈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방안에 책을 가득 채우는 게 더 낫다’, ‘책이 없는 백만장자가 되기보다 차라리 책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거지가 되는 게 한결 낫다’, ‘나는 한 시간의 독서로 시들어지지 않는 그 어떤 슬픔도 경험하지 못했다’ 등 어느 것 하나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릴 말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잊지 못하는 말은 ‘책천자(冊賤者)는 부천자(父賤者)’라는 말이다. 책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아버지를 천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 말은 청계천과 광화문 일대에서 오랫동안 ‘공씨책방’을 운영하다 작고한 ‘우리나라 헌책방의 대부’ 공진석 선생이 내게 한 말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책을 부모님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이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다. 책은 나의 부모이자 스승이다. 만일 신께서 내게 다시 20대로 살게 해주신다면 나는 무엇보다도 책을 많이 읽겠다. 지금 이 순간도 무릎을 꿇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책을 많이 읽을 테니 다시 20대로 되돌려 달라’고 신께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다.

대학생활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책을 읽는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하는 일이 몇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은 그 황금의 대학시절에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직장에서 요구하는 직장인이 되려고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책을 읽고 싶어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얻기는 힘들다.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결국 마음이 부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마음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20대에 책을 많이 읽어 부자가 될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을 형성해야 한다.

불행히 나는 이런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해 불행한 20대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불행한 일을 많이 겪었지만 20대에 책을 마음껏 읽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 인생에 가장 큰 불행이라고 생각된다.

그래도 20대 때의 시를 향한 열정만은 책을 읽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었다. 재학 중에 군에 입대해 병장으로 진급하고 받은 첫 봉급 7백 원으로 서정주 시집 『동천(冬天)』을 사기도 하고, 친구한테 부탁해서 『서정주 시선』을 구해다 시집 비슷한 크기의 노트에 시집 전체를 직접 베끼기도 했다. 군대 내무반에서 고참들 눈치를 봐가며 만년필로 또박또박 정자로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정성껏 베껴 쓰면서, 심지어 판권까지도, 판권의 조판 모양까지도 그대로 정리하면서 나는 비로소 서정주의 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시의 전통적 정서와 가락을 그때 내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시를 공부하는 데에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그 시절에 내가 필사한 『서정주 시선』을 지니고 있다. 세상에 한 권밖에 없는 시집이므로 여간 애지중지하는 게 아니다.

한 권의 책이 주는 기쁨은 부모님이 한없이 나를 사랑해주신 기쁨과 같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책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하나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결국 20대에 제대로 책을 읽지 못했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나의 영혼은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프다. 사람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밥을 먹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이라도 더 이상 배가 고파지지 않기 위해서 더 열심히 책을 읽고, 깊은 사고의 과정을 통하여 마음의 기쁨과 고요함을 함께 얻고 싶다.

책은 한 인간의 영혼의 모습을 결정짓는다. 인간은 책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워질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은 책을 읽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인간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면, 책을 읽는 젊은 청년의 모습 또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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