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기를 만나다

 

서울대 법대 55학번, 가야금 명인. 선뜻 어울리지 않는 듯한 두 이력을 가지고 있는 이가 바로 황병기씨다. 각국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동질화 돼가는 오늘날, 자국의 문화 정체성을 지키고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는 과제다. 15세 때 가야금과의 첫 만남 이후 지난 50여 년간 한국 예술계의 산 증인이었던 황병기씨를 만나 재학 시절 서울대의 모습, 국악과 가야금의 매력 등에 대해 들어봤다.

◆서울대 재학 시절의 학교 분위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내가 학교 다닐 때는 학교가 동숭동에 있었지. 문리대가 동숭동에 있었고 음대는 지금의 의대 부속병원 자리에 있었어. 미대는 법대와 문리대 사이에 있었고, 법대 건너편에 수의대가 있었고……. 그 때는 선생님이 한번 들어오시면 어떤 과목이든 세 시간을 강의하셨지. 그리고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30분은 늦게 들어오는 것이 관례였어.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 학기가 어느 정도 지나면 선생님이 늦게 들어오시는구나 하고 스스로 깨달았지.

또 법대 학생 숫자가 법학과와 행정학과 각각 150명씩 300명이었는데, 학생들이 결석 안하고 모두 출석하면 좌석이 부족해 자리를 미리 잡아놓지 않으면 서서 들어야 했어. 아, 또 교학과에 출석부가 있어서 각자 자기 도장을 가져와서 그 날짜에 학생들이 도장을 찍었어. 어떤 경우에는 열흘 치를 미리 찍어 놓는 거야. 나도 그랬어. 생각해보면 엉터리이긴 했지만, 낭만이 있었어.

그리고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대학을 ‘최고학부’라고 불렀어. 요즘은 책이라도 한 권 내려면 박사 학위쯤은 있어야 하지만 그 때는 누구누구 ‘문학 학사’라는 이름으로 책을 내기도 했거든. 그 때 대학은 ‘아카데미’였어. 당시 대학생들은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다’라는 자부심이 강했어.

◆선생님은 대학 재학 시절 어떤 학생이셨나요?
공부에 미친 공부벌레는 아니었지만 공부를 좋아하기는 했지. 기억에 남는 과목이 황산덕 교수의 ‘법철학’, 황태영 교수의 ‘헌법학’이야. 교양과목은 뭐 기억이 흐린데 영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군.

◆법대를 졸업하시고 서울대 국악과 강사로 부임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내가 졸업하던 해에 서울대에 국내 최초로 국악과가 생겼어. 그때 음대 학장이 현제명 선생님이셨고. 내가 4학년이던 가을에-당시는 서로 연락할 때 전화도 잘 이용 안 하던 때야-음대에서 심부름하는 학생이 법대로 나를 찾아 왔더라고. 음대 학장님이 “내년에 국악과가 생기는데 네가 가야금 강사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신다더군. 난 어리벙벙했지. 며칠 후에 다시 찾아뵙고 못하겠다고 했지.

현제명 선생님이 나를 뽑으신 건, 이건 내 짐작인데, 아마도 내가 고3 때와 대학교 3학년 때 두 번 전국 콩쿠르에 나가서 1등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일 거야. 그래서 신문에도 나고 그랬거든. 그 때 선생님이 날 마음에 둔 게 아닐까 싶어. 거절은 했지만 현제명 선생님이 간단히 물러날 분이 아니었지. 그 분이 “법대 나온 사람은 너 말고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가야금은 네가 아니면 안 된다. 이러한 귀한 일은 네가 해야 한다”고 하시더군. 아버지뻘 되는 분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 나를 저렇게까지 평가해주는데. 그래서 나가기로 했지. 속으로 이왕 이렇게 됐으니 딱 4년만 가르쳐야겠다 싶더라구. 내 첫 제자가 졸업을 할 때까지만. 그때 제자 1기가 지난 8월에 정년 퇴임한 이재숙 교수야. 2기는 지금 국악과의 김정자 교수고.

◆교수 재직 시절의 현제명 선생님에 대해 더 말씀해주세요.
당시 현제명 선생님은 음악계의 황제 같은 존재였어. 서울대 음대도 거의 현 선생님 개인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미국에서 중고 피아노를 사다가 남산에 사설음악학교를 세웠는데 그게 서울대로 들어간 거야. 경성제대에는 음대가 없었거든.
강사로 있었을 때 4[]19혁명이 일어났어. 그런데 그 때 음대 학생들이 현 선생을 반대하는 데모를 했어. 그 분이 음대에서 워낙 영향력이 큰 분이셨으니 학생들 눈에는  독재자로 보였던 거야. 그런데 선생님 입장에서는 당신이 세운 음대의 학생들이 자식보다 사랑스러웠을텐데, 그 학생들이 자기한테 들고 일어나니 그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겠지. 그 이전에는 데모라는 거 자체가 없었어. 그런데 처음으로 데모라는 게 생겨서 그 화살이 자신한테 돌아오니 너무 놀라셨던 거야. 그래서 그 충격으로 쓰려지셨고, 일주일 후에 돌아가셨어. 그 때 음대가 을지로로 와 있던 때인데, 그곳에 현 선생이 음대 최초로 콘서트홀을 지었거든. 그 콘서트홀 무대에 관을 놓고 장례식을 했어. 그 때 선생님 제자였던 성악과 여학생이 그 관에 손을 얹고 선생님이 작곡하신 「해는 져서 어두운데」를 불렀어. 관에 손을 올리고 노래를 부르는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더라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울었어. 나는 절대 울지 않는 사람인데 나조차도 눈물이 핑 돌았으니…….

◆1974년 이화여대에 부임하시기까지 여러 일들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63년부터는 이것저것 했지. 명동극장에서 지배인도 했었고, 화학공장에서 기획 일도 했고, 출판사도 직접 운영했었고. 다큐멘터리 영화사도 운영했고, 외국영화 수입도 해봤어. 그런데 음대를 그만두고서 음악하고 관계가 더 깊어졌어. 1964년 국립국악원이 최초로 해외공연 할 때 가야금 연주자로 초빙돼서 연주했었고, 1965년에는 하와이에서 열린 금세기 음악예술제에 초대돼서 앨범까지 냈지. 작곡은 1962년부터 했고.

그러다가 1974년에 이대에 국악과가 생길 때 이대에서 나보고 국악과 교수 겸 과장을 맡아달라고 초청을 했어. 그게 38살 때야. 그 때 무언가 한 가지에 전심투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지. 음악을 완전히 그만두든지, 아니면 오로지 음악만 하든지. 결국 음악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서 ‘지금부터는 죽을 때까지 음악만 하겠다’고 결심했어. 그때부터 ‘나는 음악가다’라는 프로의식을 가졌지.

◆국악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이 연주하시는 가야금 산조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내 음악이 산조가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전통 산조를 따르지 않아. 산조에는 ‘내 작품’이라는 게 없는 거야. 창작하는 게 아니거든.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에 기초를 두고 거기에 자신의 스타일을 덧붙이는 거지.
산조는 순수한 절대음악이야. 내용이 없어. 아름다운 꽃을 보고 ‘왜 이 꽃이 아름다운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무의미하듯이 산조는 아름다움 그 자체야.
이제 산조의 시대는 갔어. 풍요의 시대에는 한(恨)이 없고 더 이상 가야금 명인도 없어. 오늘날은 창작음악의 시대지. 나도 완전히 새로운 가야금 연주곡을 창작하려고 하고. 물론 산조를 전통 문화로서는 당연히 보존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산조를 처음 들을 때는 꼭 전곡을 들어봐. 한 곡이 70분 정돈데, 방송에서 연주하는 건 이걸 짧게 편곡한 것이거든.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신다고 하셨는데, 선생님께서 추구하는 음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또 대중적[]상업적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무엇이 대중적인 것이냐의 정의는 상대적이지만, 요즘 대중의 기호에 맞추고자 하는 게 대중음악이라 할 수 있지. 그런 의도가 아니면 아닌 거고.
나는 내 작품의 대중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대중들도 분명 깊은 마음 속에서는 비(非)대중적인 걸 원하리라는 믿음이 있어. 비유를 하자면 사람들이 청량음료를 좋아하면서도 맘 속 깊은 데는 깊은 산 속의 샘물을 먹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야. 나는 샘물 같은 음악을 만들고 싶어. 대중들 스스로 전혀 들어보지 않은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욕망을 충족시켜야 해. 많은 수는 아니겠지만 그런 ‘다른’ 음악들이 늘어나면 새로움에 대한 욕구도 점점 확대될 거라고 생각해.

◆국악을 서양음악[]현대음악과 접목한 크로스오버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예술에서 ‘뭐는 되고 뭐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없어. 다만 무엇을 해도 좋은데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음악을 만들어야 해. 나는 작곡할 때 절대 서양음악은 흉내 안 내. 전혀 다른,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음악을 만드는 게 내 바람이야.

◆지난 2003년에는 문화다양성협약을 지지하는 공개서한을 ‘문화 다양성을 위한 국제 네트워크’(International Network for Cultural Diversity)에  보내기도 하셨는데요.
나는 문화다원주의자야. 전 세계 음악이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단일화되는 것에 반대해. 각 나라마다 특색 있는 음악이 있어야지. 한국음악의 세계화가 마치 미국음악화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진짜 세계화가 아니야.
그렇다고 한국 사람이라서 국악을 좋아해야 한다는 건 옳지 않아. 예술에서까지 애국심을 발휘할 건 없지. 그렇지만 진짜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국악도 좋아하게 될 거야.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면 국악도 자연스럽게 좋아질 수밖에 없을 거라고 믿어.
문제는 한두 개를 가지고 그게 전부인 줄 아는 거야. 다양한 게 제일 중요한 거야. 사람들이 음악을 편식하지 말고 들었으면 좋겠어.  

◆끝으로 요즘 대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 말씀 해주세요.
학생의 본분은 결국 공부니까, 자기가 하는 공부를 정말로 좋아서 했으면 해.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서 하면 인생도 즐겁고 진짜 힘이 나오는 거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좋아하는 것이고 좋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즐기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지. 사실 ‘잘 해야겠다’는 마음도 버려야 돼. 그냥 즐기면, 거기서 무서운 힘이 나오기 마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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