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황귀영 기자>

당시 출판되지 못했던 채만식의 처녀작 「과도기」의 친필 원고는 문장 위에 그어진 붉은 줄과 보랏빛 삭제(削除) 도장으로 얼룩져 있었다. 방민호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이를 스캔하여 원문, 현대역과 함께 『과도기』로 엮었다.
방 교수는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중 채만식 선생의 둘째 아들인 채계열 선생을 찾아가 「과도기」 육필원고를 직접 보게 됐다”며 “일제시대 문학작품의 검열상황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원고의 사료가치를 깨닫고 언젠가 이를 책으로 펴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됐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현재 채만식의 친일 행적으로 ‘채만식 문학상’ 폐지 등의 논란이 있으나, 그의 처녀작 「과도기」에는 채만식의 시국 비판이 잘 드러나 있다. 방 교수는 “이 원고는 그의 자유지성과 비판정신이 현실의 제약과 간섭 속에 마모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라고 설명했다.
원고에 ‘삭제’도장이 찍힌 부분은 ‘그놈은 아주 지독한 친일파놈이드랍니다’나 ‘유식한 애국자가 되면 민족의 체면을 팔아먹어도 괜찮은가’와 같은 정치적 ‘불온’ 문구, 일본 여성인 문자(文子)와 조선 청년인 형식의 사랑을 그린 부분이다. 이에 대해 방 교수는 “조선인은 완전한 일본인이 돼야 한다는 ‘일선 융화’를 주장하면서도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랑을 허용하지 않는 일제의 모순은 결국 일선 융화 정책이 차별과 배제에 바탕을 두었음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방 교수는 “「과도기」라는 제목은 ‘남녀해방으로 나아가는 과도기’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그는 “신교육을 받으면서도 조혼(早婚)으로 자유연애와 사랑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서로에게 구속되고 억압받는 남녀관계가 작품 속에서 묘사된다”며 “여성이 봉건적 가족 굴레에서 해방돼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지 못하면 남성의 해방도 불가능하다는 채만식의 페미니스트적인 면모가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또 조선 유학생 정수가 일본 여성 문자에게 자신이 지은 동화를 읽어주는 부분에 대해 방 교수는 “민담 형식의 동화에 드러난 순수한 의식 세계는 정수가 조혼과 시대상에 의해 구속되기 이전의 세계를 상징한다”며 “억압과 구속으로 불행했던 채만식이 동경한 세계 역시 이런 세계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방 교수는 “우리 문학의 역사는 일제·군사독재정권 등 파시즘 체제 아래에서 이뤄졌다”며 “우리 문학을 연구할 때에는 단순히 작가의 행동이나 작품만 볼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 타협해야 했던 복잡한 내면심리와 사회적 문제까지도 폭넓게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채만식의 친일행적에 대해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지 못한 것은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해방 이후 대일협력 행위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하지 않고 「민족의 죄인」, 「낙조」 등의 작품을 발표해 진정한 반성을 시도한 작가는 채만식이 유일하다”며 “채만식을 긍정 또는 부정하는 택일논리를 떠나 채만식의 작품세계에 대한 심층적이고 섬세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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