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관 실습을 다녀와서


초등학교에서의 참관실습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마 ‘아이들의 눈빛’일 것이다. 해맑다거나 순수하다거나 하는 감상이 아니라, 교육의 역할, 학교의 역할, 교사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눈빛… 아이들은 사랑과 관심을 열망하고, 갈구하고 있었다. 실습생 우리 개인이 각각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눈을 맞춰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있어주는 일, 그것이면 아이들의 무한한 신뢰가 돌아온다. 저릿한 감동이 있었다. 교육의 시작은 사랑이라는 것을 막연히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이번 참관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소득이다.

 

삼일간의 실습을 마치고 작별인사를 하는데 몇몇 아이들이 눈물을 훔친다. 원래 아무 일에나 잘 우는 아이들이었다. 그저 뭐든 자기 마음대로 안 될 때는 울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그냥 아주 어린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그 눈물이 큰 희소가치가 없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나오고 몇 분 후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냥 잊어버리고 말 그런 눈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데 나도 따라 눈물이 났다. 예전 같으면 ‘책임지지 못할 눈물’을 흘린 것을 후회하고 부끄러워했을지 모른다. 어차피 몇 분 후면 우리의 눈물도 금세 이 가을 속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내 눈물에 부여한 의미는 조금 달랐다. 아마도 이번에 아이들을 보면서 교사라는 사람의 보람에 대해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때 나는 교사는 참 허무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몇 년을 학교를 다녔지만 지금 찾아가는 선생님이 아무도 없는 것을 생각하면서, 아무리 열성을 다해 가르쳐 봐야 돌아오는 것은 없는 매년 힘만 빠지는 직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삼일 짧은 시간 아이들의 눈빛을 느끼면서 알았다. 교사가 바친 열정은 저 아이들의 눈빛 속에 고스란히 담겨 간다는 것, 교사의 열정은 어디로 흩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 저 아이들 속에 그대로 남아서 아이들의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것, 굳이 아이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준 것은 그대로 아이들 속에서 그들의 꿈이 되고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될 것이라는 것, 그렇게 남아서 아이들의 눈빛에 깊이를 더해줄 것이라는 것.

 

헤어지던 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아이들에게 줄 편지를 썼지만 주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망정, 어쩐지 그 시간이 아깝지는 않다. 아이들이 내게 알려준 것―다시 만나지 못할 아이들에게 그렇게 정성을 다해 편지를 쓰면서도 이젠 하나도 허무하거나 안타깝지 않았다는 것, 앞으로 우린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기억하거나 하지 않거나, 오랫동안 연락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저 내가 눈빛을 줄 수 있을 때 내 온 정성을 다해 주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 지금 안타까움에 눈물이 나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 책임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 때문에 일부러 삼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 하나 배운 것만으로도 되었다.

 

아이들이 보여준 작별공연에서 음악에 맞추어 자신의 열정을 마음껏 발산하는 모습이 참 감동이었다. 보면서 또 눈물이 났다. 이렇게 신나게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일진데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를 가두고 남을 가두고 눈치 보며 거짓을 행하며 살 수밖에 없는가. 교육이, 혹시나 여태까지 우리 교육이 이 아이들을 가두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 아이들, 커 갈수록 교육에 갇혀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방교육, 이것은 꼭 지배자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닐 것이다. 교육은 그 자체로서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 자신을 가두는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교육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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