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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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가 또 귀 주변을 맴돈다. 올가을엔 유난히도 모기가 극성이었다. 잠들자마자 물고 가버리면 차라리 좋으련만, 꼭 새벽녘이면 어김없이 귀 주변을 서성이며 기어이 곤한 잠을 깨우곤 했다. 나이 오십 줄에 접어든 마당에, 모기 따위에 기분이 언짢아진다는 것이 남세스럽기도 하고, 기어이 오십 줄에 턱을 걸치기까지 모기에 신경 쓸 만큼 한가하게 산 적도 없건만, 올가을의 모기는 유독 내 심기를 톡톡 건드려댔다. 고개를 돌려 눕자 옛 엄마 품인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편안함으로 나를 이끄는 잠결에, 창가로 스미는 아스라한 빛결에, 다시금 몽롱해지려는 찰나, 모기는 또다시 ‘윙윙’ 소리를 낸다. 그리고 순간 독하게 풍겨 나오는 암컷의 기운. 내 몸을 탐하는 모기의 강한 음기(陰氣)에 순간 섬뜩해진다. ‘위이~이이잉! 위윙!’ 내게 무슨 앙탈을 부리는 중인지, 아니면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인지, 날카로운 날갯짓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러고 보니, 옆집 사람들을 따라온 저 아랫나라 모기들인가. 그즈음, 저녁이면 무슨 독한 땀냄새를 닮은 음식 냄새가 옆집에서 비어져 나오곤 했고, 그 집에선 유독 눈동자의 흰자위가 도드라져 보이는 젊은 남녀가 동굴에서 나오는 산짐승 마냥,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반지하 방을 나서곤 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더니, 이런 땅굴 같은 반지하 방에서 외국인들과 벽 한 칸 사이에 두고 잠을 자게 될 줄이야. 자다 깨서 마음이 너무 유순해져 있는 것일까, 나이 들어가며 어느 순간 나를 완전히 떠난 것만 같았던 이유 없는 서글픔이 새삼스레 내 곁을 잠시 머물다 흩어졌고, 모기 역시 다른 데로 날아가 버렸는지 귀 주변은 고요했다. 그 적막한 공간으로 다사로운 햇볕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소 조급해진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누웠지만, 이미 어디론가 숨어버린 잠의 주파수를 끝내 찾지 못한다.


- 여기 이렇게 방치된 수건 보이시죠? 이런 거 수거해서 지하 세탁실로 옮기시고, 헤어 드라이기는 항상 선반에 다시 올려두시고, 또 바닥 청소는 두 시간에 한 번은 꼭 하시구요.

나보다 딱 절반만큼의 세월을 흘러온 듯한 여자가, 자기보다 딱 절반만큼의 나이 줄에 닿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 조곤조곤 설명했다.

- 예예.

마침맞게 바닥에 떨어져 있던 또 다른 수건이 눈에 들어왔던 터라, 얼른 그것을 집어들며 대답했고, 그렇게 몸을 숙인 채 고개를 드니, 아닌 게 아니라 꼭 그녀의 허리 부분이 시야에 닿을 듯 말 듯한다. 잠시 ‘참 잘했어요’의 눈빛을 보내준 그녀는 이내 샤워실로 걸음을 옮긴다.
부산댁으로부터 소개를 받은 이곳은 대학 내의 스포츠 센터였다. 봉천동에 살게 되면서, 저 고개 넘어 어디에 큰 대학교가 하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곳에 일자리를 얻게 될 줄은 몰랐다. 대학이라면 언제나 나와는 먼 이야기였고, 나는 영영 그 안에 발 디딜 일이 없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어쨌든 고작 청소일이었지만, 어쩐지 대학에서 일을 한다니 왠지 모르게 자꾸만 주눅이 드는 것만 같았고, 그런 스포츠 센터는 처음이기도 해서 더욱 마음을 다잡았다.

- 그리고, 특히 이 머리카락들 있죠. 이거 항상 꼼꼼하게 자주 치워주셔야 돼요. 안 그러면 금방 막히는 거 아시죠?

배수구에 뭉쳐 있는 머리카락을 가리키는 그녀의 손가락은, 간밤의 모기다리만큼이나 얇고 가벼워 보인다. 방금 다잡은 마음 같아선 당장 그 머리카락들도 집어 들어야 할 듯했지만, 간밤의 모기가 언뜻 스쳐서인지, 그녀의 손가락이 얄밉게만 느껴졌다. ‘예예’ 다시 대답하며 집어들었던 수건을 꽉 움켜쥔다. 수건 안에 갇혀 있던 모기들은 숨이 막히는지, 손가락 사이로 무섭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런 살결이면 이제 갓스물이나 넘겼을까.

탐스러운 우윳빛 살결에, 중력보다는 그 몸을 탐내는 달의 인력이 보다 강해 아직 탄탄한 탄력을 유지하고 있는 몸뚱이 하나가 곁을 스쳐간다. 수영장으로 통하는 통로에서부터 한 모, 두 모 오동보동한 살덩이들이 샤워실로 들어왔고, 곧 이내와 같은 수증기가 샤워실을 가득 메우자, 두부공장에 와있는 듯 방금 찍어낸 신선한 두부들의 내음에 현기증이 이는 듯했다. 그렇게 젊은 기운이 몸을 가득 채울 때까지 샤워실을 버정이다가 숨이 벅차오르면 탈의실로 나오곤 했다. 할 일 없이 젊은 처자들 몸 씻는 것을 보고 있자니 처음엔 좀 낯 간지러웠지만, 그렇게 온몸을 습기로 채우고 나면 어쩐지 다시 젊어진 듯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여름이 뒷걸음쳐갈수록 세상은 건조해졌고, 목을 거쳐 아랫배 언저리까지 이어지며 깊어져 가는 갈증을 나는 그렇게 해결하곤 했다.

샤워실을 나서자 한기가 엄습했는지, 어깨를 살짝 움츠린 여성이 수건으로 몸을 닦기 시작한다. 수건이 지나간 사타구니에 야트막하게 돋아난 닭살을 보자 순간 아랫배가 움찔했다. 망측스럽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맛깔스런 냄새에 어느새 군침이 고여 버리듯, 스스로를 어쩌지 못한 채 그녀의 몸을 힐끗힐끗 따라가고 만다. 거울 앞에 선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물이 떨어진 자리마다 곧 풀이 돋아나고, 싱그러운 향내가 탈의실에 퍼지기 시작한다. 미처 손이 닿지 않은 듯, 등 가운데 들풀처럼 돋아난 척추뼈에 이슬이 맺혀 있다. 고여 있던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윽고, 거울로 비치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고, 내 얼굴은 곧 발그랗게 물들고 말았다. 나이 들어서 이 무슨 주책인지……. 화끈거리는 얼굴을 서둘러 돌리고, 수건 수거함을 밀며 밖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거울 앞의 그녀가 잰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수거함에 수건을 넣으며 빙그레 웃었다. 휴- 비로소 한숨이 나온다. 수거함을 밀고 밖으로 나온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승강기가 올라오고 있다는 화살표 표시가 쑥쑥 올라온다. 올라온 화살표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자, 문득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결국 자신 앞에 철창을 하나씩 늘려나가는 것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아직 그 철창이 너무나 성겨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그녀의 몸을 생각하자, 앞머리가 간지러워진다. ‘띵!’ 문이 열리고, 나는 지하 세탁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모두들 그렇게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다. 자기 자신과 눈이 마주친 채 입술을 살짝 올리는 표정들은 하나같이 자신감에 넘쳐 보였고, 심지어 다소 걱정이라는 듯 조심스레 자신의 몸을 살피는 시선 역시, 허탈함을 숨기며 내 몸을 보는 나의 시선과는 완연하게 달랐다. 어쩌다 거울을 통해 나와 눈이 마주치면 하나같이 곧바로 온화한 미소를 보내며, 그 순결한 자신감을 드러낼 수 있는 그 찰나의 기회조차 좀처럼 놓치는 법들이 없었다. 상처투성이인 자신감을 애써 감추며 미소로 답해주고, 언제나 내 시선은 그들이 떨어뜨린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긴 생머리, 커트 머리, 파마머리, 노란 머리의 여성들이 머리를 말리고, 빗질을 하고, 핀을 꽂는 동안, 나는 청소기를 밀며 머리카락들을 빨아들였다. 그렇게 청소가 끝난 뒤 청소기를 분리시켜 보면, 헝겊으로 감싼 필터에는 뒤엉킨 머리카락들이 버려진 개처럼 애처롭게 웅크리고 있었다.

한 차례 청소를 마치자 탈의실은 비어 있었다. 청소기를 끌고, 탈의실을 나서려는데 마침 샤워실에서 한 명이 막 나왔다. 속 안이 훤한 푸른 두 눈을 보자, 갑자기 몸 안에서 어떤 이질감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마치 내 자신을 노출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나는 불편한 시선을 그녀의 얼굴 아래로 거두었다. 얼굴과 목 주변의 하얀 살결 사이사이로는 깨로 양념을 한 것처럼 잘잘한 점들이 뿌려져 있었다.

- 저기요, 제쏭함니다아. 타얼 이써요?

- 이?

- 타, 우월!

몸을 닦는 시늉을 하자, 그녀가 원하는 것이 수건인 것을 알았다. 입실할 때, 카운터에서 받고 들어와야 하나 깜박한 모양이었다. ‘이~ 수건!’ 대답하고, 캐비닛에서 예비 수건을 가져다 건넨다. ‘캄사함니다.’ 나는 무어라 더 말해주고 싶었지만, 혀 끝이 근질거리기만 한 것이 눈만 깜박여질 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커다란 입으로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내 앞머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을 그곳을. 내 머리가 눈에 띠는 속도로 빠지기 시작한 것은 작년 가을 무렵이었다. 어쩌다 나와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된 사람들은, 그곳으로 시선이 가고 있음을 좀처럼 숨기지 못했다. ‘이~ 수건, 수건!’ 결국 똑같은 말만 반복하며 애써 시선을 환기시켜본다. 그때, 중년의 여성이 한 손에 수건을 든 채, 막 탈의실로 들어섰다.

- 아! 안녕하쎄요, 교수님!

교수의 입에선 꼬부랑 말이 꼬부라짐 없이 술술 나왔고, 서양인이라 그런지 알몸임에도 젊은 여성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상태로 대화를 나눴다. 탈의실에는 나까지 세 사람뿐이었고, 그들은 아주 간간이 내게 주의를 주는 듯했다. 나는 청소기를 끌고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잿빛 청소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으로 알몸의 서양 여성이 당당한 몸가짐으로 무어라 말을 걸어온다. 내 곁에서 갑자기 교수가 나타나더니 대신 말을 받는다. 다시 그 옆, 잿빛 항아리 모양의 청소복 안에 늘어지고 처져있을 살결을 생각하니, 그나마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알몸으로 청소를 한다면, 그 몸은 얼마나 초라해 보일까. 문이 열리며 세 여성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역시나 대학에서의 일은 단단한 마음가짐으로도 벅찬 것이었을까, 날이 건조해질수록 내 심보도 점점 메말라 가는 것인지,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을 일들에 대해 바삭해진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마냥 떼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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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름칙한 기분으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모기가 또 잠을 깨웠고 끝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그렇게 아침을 맞았다. 푸석푸석한 얼굴에 분을 바르고, 부쩍 늘어난 흰머리를 보며 염색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울을 보며 나는 좀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밤사이 늘어난 주름과 넓어진 이마만을 애써 담담한 마음으로 가늠해 볼 뿐. 새벽 5시 30분. 6시부터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집을 나선다.

- 엄마나! 깜짝이야!

옆집 문이 열리며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잠시 나를 가로막았다. 도깨비가 아니라는 판단으로 시소의 균형이 기우는 찰나, 또 한 쌍의 눈동자가 그 뒤에서 나타났고, 기어이 널뛰기하는 사람 마냥 반대 균형으로 뛰어오르고서야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내 눈은 그렇게까지 반짝이지 않아서인지, 득도라도 한 사람들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평정함을 유지한 채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남자는 대문을 나섰다. 안으로 든 여자가 문을 잠그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도 열쇠를 돌리고 집을 나선다. 놀란 가슴이 쉽사리 잦아들 것 같지 않았지만, 새벽안개의 촉촉함이 몸을 감싸자 어쩐지 마음이 한결 녹아드는 듯했다. 뻣뻣했던 얼굴이 이슬을 머금자 한결 부드러워진다. 그래, 저들도 다 살자고 낯선 땅으로 접어들었을 텐데. 새벽 첫차를 기다리며, 겨울로 접어들면 내복이며 다른 옷을 단단히 껴입어야 이 새벽을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남쪽에서 온 저 사람들은 이 땅의 추위가 그토록 매섭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그래서 겨울이면 이 처량함과 막막함이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으로 깊어진다는 것을 과연 헤아려나 봤을까.

밤사이 가녀린 그믐 빛의 무게만 감당했던 풀장의 수면은, 칼로 베어놓은 듯 반듯했다. 남자 샤워실 쪽에서 학생 한 명이 처음으로 수영장에 들어섰고, 곧 다이빙으로 입수를 했다. ‘첨벙!’ 소리를 들으며 다시 탈의실로 들어가 청소를 시작했건만, 웅성거리는 소리에 다시 풀장으로 나가보았다. 남자는 들것에 실려 급히 수영장 밖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들것이 흔들리는 것보다 작은 폭이지만 훨씬 빠른 주기로,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스프링처럼 그를 튀어 올렸을 두 발이 머쓱한 표정으로 하얗게 기가 질린 채, 묵묵히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당황하고 놀란 사람들의 눈빛을 보자, 가라앉았던 가슴이 새벽에 문을 열던 순간처럼 다시금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3층 높이에, 자연광이 들도록 천장이 유리로 지어진 수영장은 곧 햇볕을 받으며 채도가 흐려졌다. 물빛마저 반사되자 경계선이 흐릿해진 사람들이 물 안으로 스미는 듯했다. 정오 무렵의 가을볕은 더욱 따사로웠고, 그 볕에 빠삭하게 건조된 젊은 몸들이 ‘풍덩!’ 들어가서는 물을 쏙쏙 빨아들였다. 새벽 첫 시간에 사고가 있었고,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모두 전해 들었으나, 그렇다고 그날의 운동을 멈추는 사람은 없었다. 쉬이 잦아들지 않는 두근거림 때문에 샤워실은 갑갑하게만 느껴졌고, 나는 줄곧 풀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발은 부지런하게 포말을 만들고 있었고, 사람들은 뒤뚱뒤뚱 앞으로 나아갔다. 불현듯 개울가에서 놀던 어린 시절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터럭 하나 걸치지 않고 첨벙대며 놀던 그 어느 날, 아랫마을의 남자 아이 하나가 바위 위에서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그 시절에도 그 아이의 엄마가 없었다면, 우리는 예전처럼 다시 물장구를 쳤을까. 사고 이후, 아이의 엄마는 가을이 깊도록 개울가를 떠나지 않았고, 그해 동네 아이들은 아무도 개울에서 놀지 않았다. 가을볕에 목이 타던 어느 날, 다시 찾은 개울가에 아이의 엄마는 없었지만, 잠깐 발을 적시려 했던 개울물 역시 까끌한 돌만을 드러낸 채 말라있었다. 울퉁불퉁 드러난 돌들에 소름이 돋았던 나는, 다시는 개울을 찾지 않았다.

부산댁과 교대를 하고 센터 밖으로 나서자, 어느새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비라도 좀 내리면 요사이 온몸으로 느끼던 갈증이 해소되리라 기대했지만, 이미 날이 서기 시작한 가을바람만이 옷감의 결을 가르고는 살갗으로 파고들었다. 으스스한 기분에 어깨를 움츠리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았다. 물방울을 머금기 시작한 외투의 달라진 표정이 번져가고 있었지만, 나의 목마름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자, 옆집의 빨랫줄 한 켠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이 보였다. 대답이 없는 옆집 문을 뒤로한 채, 나는 옷가지들을 거둬 집으로 들어갔다.

- 아, 디, 티?

- 네, 마자요, 아디티.

아디티의 서글서글한 눈망울은, 신비로운 모험을 앞둔 아이처럼 한결 빛을 더해 반짝였다.

- 비리야니, 바압! 라씨, 요쿠르트!

그녀가 가져온 쟁반에는 누런빛으로 볶아진 밥과, 그녀의 말대로 요쿠르트로 보이는 하얀 음료수가 들려 있었다. 비가 와서 빨래를 대신 걷었다는 말을 내가 전하기 힘들었듯, 그녀 역시 그에 대한 보답을 말로는 충분히 표현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와 같은 보답에 대한 거절의 몸동작은, 보답하는 이가 한 번 더 마음을 표하며 기어이 생색을 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맹점이 있다. 그리고 기꺼이 받는다면, 보답하는 상대가 내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것을 아디티의 나이쯤에나 깨달았으려나. 쟁반을 받아들고, ‘이리 들으와, 아이 들우와!’ 아디티를 방 안에 들였다.

- …….

은혜와 보답에 대해서는 나름의 연륜이 있었지만, 소통의 언어가 까마득한 상황에 대한 대비는 좀처럼 없었다. 아디티는 눈의 흰자위만큼이나 반짝이는 이빨을 드러낸 채, 그저 웃고만 있다. 겸연스러워하는 눈빛을 읽어내자, 그날 새벽, 그들이 유지한 무덤덤함은 실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비롯되었던 것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혹시나 내가 해코지를 하지나 않을까, 그러면 또 무슨 말과 동작으로 자신들의 무죄를 증명해야 할까, 하는 두려움이 빚어낸 경직에 지나지 않았음을.

- 그래 어디, 무슨 나라? 어느 나라?

- …… 인디아, 인도.

침묵을 깨고, 대뜸 나라를 물어보며 나는 왜 두 손으로 원을 그렸을까. 고개를 갸웃하던 아디티가 웃으며 대답했고, 나는 진리를 깨우친 것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과장된 동의가, 때로는 그것에 대해 잘 모르거나 관심이 부족할 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아디티 나이 정도면 감지할 수 있었으리. ‘가만있자,’ 다시 어색함을 깨고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마침 냉장고에 들어있는 포도 한 송이를 씻어서 내고, 아디티가 가져온 접시를 비우고는 거기에 김치를 담았다. 아디티는 크게 손사래를 치며, ‘아니요’를 반복한다. 말도 안 통하겠다, 이럴 때는 무대뽀로 생색을 내는 수밖에.

아디티가 가져온 밥은 짭조름하기만 한 것이 영 입맛에 맞지 않는다. 허나, 요쿠르트는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듯 부드러웠고, 그 비릿함은 이국의 젖소를 떠올리게 했다. 순박하게 끔벅하고 감았다 뜨는 눈망울만큼은 고향의 소와 다를 바 없는 이국의 소를.

클렌징 솜이 지나간 자리마다, 연하게 드러나 있던 기미며 검버섯들이 한숨들을 내쉬며 툭툭 모습을 드러냈다. 부산댁이 오전을 담당하고 내가 오후의 일을 하게 되는 날이면 그렇게 화장을 지우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폐장이 가까운 시각, 센터 회원이 가장 적은 그 시각이면 그 여교수는 그렇게 홀연히 나타나 혼자 수영을 즐기다 가곤 했다. 이윽고, 얼굴을 가리던 장막이 완전히 거두어지자 얼굴 전체가 심호흡을 했고, 푸근한 인상의 눈매는 훨씬 편안해 보였다.

- 아유, 수고하십니다.

내 앞머리로 가는 시선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수그리며 인사를 건넨다. ‘예예’ 돌아서는 나는, 유독 많이 흘려놓아 그녀의 것임을 바로 알 수 있는 머리카락을 치우러, 그녀가 서 있던 자리로 간다. 그 서양 여성과 대화하던 모습을 처음 봤을 땐, 나보다 너댓 살 어리겠거니 했다. 그러나 말끔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녀를 보자 오히려 나보다 나이가 많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특별히 화장을 진하거나 요란하게 한 것은 아니었고, 아니 오히려 나보다 훨씬 덜한 화장을 했다. 단지, 그녀에게는 ‘늙음’이 자연스럽고 조화로워 보이는 것이 나와는 다른 점이었다. 그녀의 기미는 나보다 많았지만 내 것보다 흉하지 않았고, 성긴 머리숱 역시 쉽게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깊어진 주름 또한 오히려 그녀의 온순하고 중후한 표정에 없어서는 안 될 것처럼 어울렸다.

포동포동 물이 오른 한낮의 몸들과는 사뭇 다른 메마른 몸을 보며, 나는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탄력을 잃으며 쳐져 가고 있는 목과 팔뚝, 어쩐지 허전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연하고 무른 엉덩이를 나는 무심한 듯 힐끗거렸다. 그렇게 그녀의 몸을 좇다가 문득, 그녀 곁에서는 청소복을 입고 있는 것이 오히려 유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화장도 지우고, 청소의 임무도 잠시 잊은 채, 늙어가는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면……. 드문드문한 거웃을 훑던 내 시선은 그녀의 배꼽 아래, 새끼 손가락만한 수술자국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옷을 입고 벗고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숨기고 싶은 무언가를 완벽하게 감추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와 알몸인 채, 단둘이 거울 앞에 서게 되더라도, 내 마음속 심연에서는 감추기 힘든 수면의 떨림이 불안하게 지속되리라는 것을 예감하며.

아디티의 남편 사자드는 가구 공장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집안에만 있는 아디티에 비해 제법 한국말을 익혔는지, ‘김치, 정말 마시썼서요’ 말하며 싱긋 웃는다. 화창한 휴일 아침에 보는 그의 눈빛은 웅숭깊어 보이기만 한 것이 고향의 소처럼 다정하기만 했다. 목욕바구니를 들고 서 있던터라, 아디티와 사자드 모두 내 뜻을 알아챘지만, 아디티는 계속 손사래만 쳐댔다. 나는 같은 여자끼리 뭐 볼 게 있고 부끄러울 게 있냐며 아디티를 채근했지만, 둘 다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사자드가 괜찮을 것이란 표정으로 아디티를 문 밖으로 들이밀었고, 결국 아디티는 사자드에게 무어라 긴 말을 했다. 순간 사자드의 얼굴이 붉어지며 당황한 표정이 되었지만, 말을 잇지는 못했다. 속내를 알 수 없기에, 무작정 아디티의 손을 잡아끌었다. 사자드는 멀뚱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우리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찜질방이 생겨난 이후로, 동네 목욕탕은 언제나 한산했다. 나는 옷을 다 벗고 체중까지 달아보았건만, 아디티는 아직도 캐비넷 앞에서 속옷을 안 벗고 쭈뼛하게 서 있다. ‘이? 글쎄 괜찮다니까~’ 어깨를 두드려주자 그녀가 속옷을 벗었고, 그 안에 덧대어진 자그마한 흰 천에 손톱만큼의 피가 묻어 있었다. 순간 미안하기도 무안하기도 한 나머지 얼굴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손가락으로 달력의 오늘 날짜를 가리켰고, 아디티가 지난 화요일을 가리켰다. ‘응~ 그럼 괜찮을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아디티의 손을 이끌었다.

온탕에 몸을 담그자 살 속이 알알해지며 정신이 몽롱해졌다. 아디티는 한쪽 구석에서 자신의 개짐을 빨고는 한동안 바가지에 따뜻한 물을 받아 계속 몸에 부었다. 달거리 하는 걸 아는 터라 무작정 손을 끌 수도 없고, 물어볼 말도 동작도 떠오르지 않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몸이 푹 고와지지는 않았지만, 좀 일찍 탕을 나와 아디티 옆에 앉는다. 때 미는 방법을 보여주고는 아디티의 등을 밀어준다. 잡티 하나 없는 아디티의 피부는 그 거무잡잡한 색깔과 어울리게 야들야들하기만 했다. 다음은 아디티 차례. 나는 때수건을 아디티의 손에 건넨다. 때 미는 것을 익히고, 서로 때를 벗겨주는 데에는 한마디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때수건만 있으면 될 뿐. 아디티는 이국땅에서 쉽게 그 방식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아디티가 비도 오지 않는데 다 마른 내 빨래를 걷어다 정갈하게 개어서 건네지 않았다면, 김치가 담겨있던 접시에 또 다른 음식을 담아 내게 건네지 않았다면, 나는 아디티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읽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몸이 앞뒤로 흔들렸고, 바닥의 타일과 플라스틱 의자가 부딪히며 ‘딕! 딕!’ 소리를 냈다. 잠시 뒤 뜨거운 물이 등 전체로 퍼졌고, 한 차례 김이 파르르 솟아올랐다. 그 때문인지, 거대하게 몸을 불린 아디티가 내 등을 꼭 껴안은 모습이 아른거렸고, 나는 온몸에 힘을 뺀 채, 잠시 그 노곤함을 즐길 수 있었다.

달빛을 머금은 그녀의 어깨는 젖은 아디티의 살결만큼이나 매끄러워 보였다. 그녀는 머리와 어깨를 주기적으로 물속에 넣었다 빼며 앞으로 나아갔고, 어깨를 타고 내리는 물로 은은한 달빛이 속속 맺혀들고 있었다. 그녀는 유유히 물을 갈랐다. 서두름도 기교도 없는 그것은 이제 막 자신의 세상을 접한 치어의 헤엄이거나, 차분히 생의 마감을 기다리는 노년 고래의 유영이었다. 그녀 곁에서 알몸이 되고 싶었던 나는, 이제 그녀 곁에서 물살을 만지고 싶어진다. 긴 추석 연휴가 끝나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된 날, 한산한 밤의 풀장에서 그녀는 제 집인 듯 편안해보였다. 벌써 기울기 시작한 달이 천장의 유리벽을 뚫고 그렇게 내리고 있었다.

보름달 아래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물의 점성을 느끼던 때가 있었다. 초조(初潮)가 끝나던 날, 그 한여름 밤에 어머니는 내 손을 이끌고 계곡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너도 이제 음기(陰氣)가 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했고,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반딧불이들은 순순히 길을 내주었다. 내 생애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함께 멱 감던 그날, 어머니는 달빛에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어머니는 이제부터 몸가짐을 더 단정히 하라고 했고, 항상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다. 어쩐지 그때 어머니가 평소보다 너무 진지해서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나는 아랫입술까지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집는 손바닥으로 느껴지던 물은 생각보다 질겼고, 끈끈한 감이 있었으며, 그곳이 진정 내 고향인 듯 편안하기도 했다. 슬슬 몸이 떨려올 때, 나는 어머니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항상 몸을 깨끗하게 하자, 절대 차게 하지 말자, 마음속으로 되뇌며 계곡을 나왔다.

유영을 즐기던 그녀를 비롯해, 마지막으로 한 차례 사람들이 샤워실을 김으로 채웠고, 이제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샤워실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가을과 함께 깊어만 갔던 내 갈증의 원인을 알 듯 했고, 어쩐지 좀 더 초연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도꼭지들을 꼭꼭 잠그고, 마지막으로 샤워실 안쪽 화장실의 쓰레기통을 비웠다. 휴지들과 함께, 손가락 크기의 빨간 막대기 비슷한 것이 나와 잠시 오싹했지만, 곧 요즘 새로 나온 생리대임을 알아보고는 초연해져야 한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이번에도 모기가 잠을 깨운 것이 분명했다. 한기에 이불을 어깨 위까지 끌어올리며 다시 잠을 청하다가, 이런 추위에 아직도 살아 있는 모기가 아무래도 요상스럽다는 생각이 스쳤다. 다시 귓바퀴를 따라 흘러들어오는 ‘윙, 윙!’ 소리. 나는 벌떡 일어나 형광등을 켰다. 기어이 이 정신 나간 모기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갑작스런 빛에 따끔거리는 눈을 찡그리면서도, 무거운 배를 이끌고 TV쪽으로 날아가는 모기를 기어이 포착했다. 브라운관에 안착한 모기는 안쓰러울 정도로 많은 피를 배에 채워놓고 숨을 몰아쉬며 앉아 있었다. 볼록했다가 잦아들기를 반복하는 배 밑으로, 브라운관에 걸쳐진 다리가 미끄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불현듯 잠시 측은한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저 놈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마땅한 방법이 없어 한동안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때려잡으면 배에 머금고 있는 피가 터질 것이 분명했다. 순간, 검붉은 배가 볼록하니 둥글었던 모기가 다시 날아올랐고, 나도 모르게 ‘딱!’ 박수를 치며 코 앞에서 모기를 잡았다. 손을 펴자 선홍빛 피가 동전 크기만큼이나 퍼져 있다. ‘쯧쯧’ 혀를 차며 화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모기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피를 빠는 이유가, 다 나중에 알을 낳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어머니로부터 들었었다. 그래서 그렇게 흡수한 영양분으로 알을 낳고는 생을 마감하는 것이 모기라고. 손을 씻고 있는데, 어쩐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엄마 생각이 나서 그런가……. 아님 모기가 불쌍해서? 차오르던 눈물이 기어이 흘러넘치자, 흐렸던 시야가 다시 밝아지면서 비로소 그 이유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모기를 때려잡지 않는 이상, 이제 나는 내 피를 그렇게 보게 될 기회가 아마도 좀처럼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이제, 어머니가 두 손에 쥐어주시던 개짐도, 새로 나온 막대기형 생리대도 모두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아랫배에서부터 꿈틀대던 갈증도, 암상스런 가을 모기의 방문도 이제는 내 생애 더 이상 없으리라는 것을. 물에 씻겨 내려가던 초라한 모기의 몰골은 말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결혼 후 7년 만에 이혼을 하고 집으로 내려갔을 때, 어머니는 나를 꼭 안아주셨다. 그 자신, 내가 결혼할 때 다시 이 집에 오게 되면 내쫓을 것이라 하셨으면서, 말없이 나를 안아주셨다. 어머니는 그런 손 귀한 집을 시댁으로 삼으려면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며,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병원에서도 모르겠다던 불임의 원인은 결국 내가 뒤집어 썼고, 두고 보자고 독하게 다짐했건만, 재혼한 남편이 자식을 낳자, 나 스스로도 더 이상 자식을 가져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밤, 어머니는 일찍 잠자리에 드셨고, 나는 옆에 앉아 부채로 모기를 쫓고 있었다. ‘어유, 웬 가을 모기가 극성이랴. 참, 그래도 달거리는 잘 하고 있는 게지?’ 그 말 한마디로, 어머니는 시댁에서의 내 설움을 단번에 녹여주었다. 돌아누우신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그때 나는 왠지 어머니가 이제 더 이상 달거리를 하지 않는 몸임을 알 수 있었다. 나의 부채 바람은 어머니 몸을 튕겨 나에게까지 닿고 있었다.

- 팔 아픈데 이제 그만 혀고 자아. 모기도 다 지 새끼 키우자고 허는 짓일 텐디.

젖은 손을 닦고 화장실을 나서자, 그때 어머니의 뒷모습과 같은 그림자가 화장대 거울에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혼자일 몸을 보자 조금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다시 자리에 누워, 베개가 흥건하다고 느꼈을 때 즈음, 나는 까무룩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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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식당 주방 보조일을 구하게 된 아디티는 주말까지도 일을 나갔다. 아디티가 쉬는 목요일, 나는 서랍 속에 묵혀 있던 생리대 다발을 아디티에게 건넸다. 생리대는 사이즈별로 제법 그 양이 꽤 됐다. 나에겐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물건임을 아디티 정도면 곧 알아챌 것이고, 그러면 버릇처럼 손사래만 치는 아디티의 손에 넘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갠차나요’ 역시나 손사레를 치는 아디티. 한두 번 거절하다가도 내가 생색내기 전에 잘 받더니만, 이번엔 한사코 ‘갠차나요’만 반복한다. 얘가 창피해서 이러나. 같이 목욕도 했으면서 뭐가 부끄럽다고 대체.

내가 물러설 기색이 없자, 아디티는 생긋 웃으며 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배를 한 번 가리키고는 가슴 앞에 두 손으로 세로로 긴 타원 하나를 그리더니, 곧 두 손을 모아 왼쪽 뺨에 대고는 자는 시늉을 한다. 다시 배를 가리키는 아디티의 두 손. 아디티는 그새 임신을 한 것이다. ‘이!’ 나도 모르게 불쑥 아디티의 두 손을 잡았다. 아디티의 두 눈이 열없이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좀처럼 아디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이 떠오르지 않아, 한동안 마주친 눈만을 떼고 있지 않자 곧 아디티의 눈에 습기가 차오른다. 허나, 이번만큼은 아디티가 지니고 있을 어렴풋한 두려움을 오롯이 읽어낼 수가 없다.

삽화: 강동환 기자

아디티가 출산을 하기까지, 뱃속의 아기는 줄곧 내 차지였다.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을 하루 종일 보고 와서는, 아디티의 뱃속에서 둥실대고 있을 아기를 또 가만히 응시하곤 했다. 따뜻하고 물컹한 뱃속, 찰진 양수에 둘러싸여 곤히 자고 있을 아기를 생각하면 어린애처럼 마냥 들뜨는 기분을 좀처럼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아디티의 배에 손이 닿을 때면, 아-디티가 태어났던 그 아-득한 공간의 깊이가 전해지는 것만 같아 숙연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바로 내 어머니도, 나도 태어났을 그 어느 깊숙한 공간……. 내가 태아였을 때, 내 어머니 역시 자신의 둥근 배를 통해 그곳에 닿아보았으리. 아주 오랜만에, 아디티와 함께 훈훈했던 겨울을 보내는 동안, 아디티의 몸은 무거워졌고, 내 몸은 점점 가벼워졌다. 치어처럼, 늙어가는 고래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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